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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 윤치호 인정애국가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기원 또는 명칭일 수도 있고, 형태나 내용에 대한 접근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노래라는 점에서 전통성이나 전수 현상이 중요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이런 과제와는 달리 의외적으로 우리 현대사와 관련하여 배태된 작사자 문제가 걸려있다. 이는 역경의 근대사를 함께한 애국가의 숙명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노래의 유통과 전승이 아닌 익명성과 의례성으로 전승된 특성으로 하여 작사자 여하(如何)는 중요한 과제로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기관인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1년 반이란 기간을 갖고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복구 중이 1956년 ‘국론분열을 우려하여’라는 정치적 이유로 이를 국가에서 공식화 하지도, 법제화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잠복되었던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문제는 90년대 들어 재론이 되었다. 1998년 정부수립 50주년, 국가상징연구회 창립5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國歌 愛國歌에 대한 再檢討’이다. 그리고 2017년 6월 한국 프레스센타에서 개최한 흥사단 주최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김연갑이 발표한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이다’에서 학술적으로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확정받았다. 그동안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譯述’의 해석 문제, 가사지의 ‘1907年 윤치호作’에 대한 오해, 이광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오류 등을 해결하였음은 물론, 다음 세 가지 핵심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독립신문 서재필 기록을 통한 ‘무궁화노래’의 윤치호 작사 확인 ②중앙대학교 안춘근(순흥 안씨)교수 발표 1904, 5년 필사 자료 3편의 위작 판명 ③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 3차 회의 결과 ‘윤치호 작사 확인’ 등의 성과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흥산단과 좌파계열의 진영논리로 윤치호 자사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를 온전하게 인정하게 하는 데는 우선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더 면밀하고 자료와 해설로 설득을 기울여야 한다. 이 글 역시 이런 의도에서 그동안 작사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자료임에도 전체적인 조명이 도외시된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를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조사위원회가 결성되기까지 얼마나 혼란이 격심했고, 그것의 해소가 얼마나 난문제였는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잃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되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조사자료집’이지 ‘조사결과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연하면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위하여 사전에 기본 자료를 취합하여 위원회 위원들에게 제공한 것이지, 조사 결과를 수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사자료 중에 "내용이 현행 애국가와 동일한 者의 有無如何는 未詳임”(1쪽)이란 표현 등을 오해하여 "조사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하였다”는 등의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제1쪽의 서문격의 글, ‘애국가화창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의 종류’, ‘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총 54쪽의 프린트본(가리방)이다. 목차는 없고 1쪽부터 본 내용이다. 서문에서는 작사자 거론 5인을 적시하고 세 가지 설(說)을 제시하였다. 내용의 첫 문장은 "現行愛國歌作詞者로 論義 되고 있는 인물로는 尹致昊 安昌浩 崔炳憲 金仁湜 및 閔泳渙의 五人이고 또한 單獨作詞說, 合作說 및 改作說이 있다.”고 하였다. 합작설은 최병헌과 윤치호의 합작설이고, 개작설은 민영환의 작사를 김인식이 개작하였고, 그 후 안창호가 또다시 개작했다는 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작설을 제기했데, 주요한과 이광수의 주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안창호가 개작하였다는 설이다. 이때 거론된 인물은 5인이고, 이들 대상의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 세 가지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문헌과 신문 소재 애국가 기록을 3쪽에 걸쳐 인용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편에 광무4년 군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했다고 한 기록을 인용하였다. 한국법전 제2장 ‘의식’편에 1908년 애국가를 연주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그리스도신문(2회 인용)에 애국가와 황실가를 화창 또는 제창했다는 기록을 인용하였다. 전자는 8회, 후자는 2회 인용하였다. 문헌과 증언이 뒤석여 있다. 애국가의 종류 "애국가의 종류가 많았던 모양으로”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보를 인용하고, 김양선 목사와 장지영과 최남선의 증언을 수록했다. 애국가와 무궁화가와 국가 세 종류를 제시했다. 특히 1902년 학부(學部) 제정 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애국가’와 관련한 기록과 위의 세 분의 증언을 통해 그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가사 일부도 제시했다. 시선을 모으는 것은 이를 ‘애국가’가 아닌 ‘國歌’로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현행 애국가를 ‘국가’는 이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있었음을 알게 한다. 작사설 서론에서 밝힌 5인에 관련한 작사설을 1955년 5월 13일 이전까지의 신문 기사와 증언 등을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민영환(2/1쪽), 안창호작사설(3쪽), 김인식작사설(1쪽), 최병헌작사설(1쪽), 윤치호작사설(6쪽) 순으로 관련설을 취합하였다. 윤치호 항목은 가장 많은 내용을 담았다. 이 윤치호설은 앞의 4인에서 제기한 설과 교차 검증을 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항목에 대해서는 다시 집중 분석을 하기로 한다. 부록 증보문헌비고와 한국법전 수록 애국가 기록과 독립신문 투고로 게재된 애국가 18편, 대한메일신보 잡보란 수록 무궁화가 2편과 애국가 수록되었다. 그리고 황성신문 ‘國歌調音’ 기사와 ‘대한제국애국가’ 가사를 수록했다, 단행본으로는 ‘한영서원 발행 프린트본 창가책 인용 애국가를 수록하고 백종섭씨 소장 창가책에서 애국가(찬미가 제1장), 현 애국가 가사를 인용하였다. 한편 서북학회보 ‘西友’에서 "학부에서는 애국가 통일 위원을 선정하였는데 위원 중에는 학부협판 윤치호의 이름도 있다.”를 인용하였다. 참고문헌 목록 21종의 참고문헌을 기록했다. 완조실록(王朝實錄-고종·순종 실기와 승정원 비서원, 규장각일기), 관보, 공사관기록, 독립신문 외 4종, 한국통사, 대한자강회보 외 2종 유년필독(幼年必讀 왜정시대 압수 책) 그리고 조선고가요집(朝鮮古歌謠集 손진태 편)이다. 의외인 것은 무가(巫歌)를 모은 ‘조선고가요집’이다. 이 시기 애국가를 수록한 해방 직후 발행의 노래책이 10여 종에 이르는데도, 이 같은 관계가 없는 무가집을 참고자료로 포함시켰다는 것은 위원회의 무성의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愛國歌作詞者調査資料’는 5인에 대한 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들을 5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 중에 작사설 항목은 이 자료집의 핵심 주제로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영환부터 윤치호 작사설까지 살피기로 한다. 1. 민영환 작사설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작사설은 두 사람의 증언에서 제기되었다. 장도빈(1888~1963)과 김동욱의 증언인데, 전자는 역사학자로 서울신문 1955년 4월 16일 자에 밝힌 내용이다. "거금 47, 8년 전 학생시대에 이미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를 불렀다. 민영환 작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1908년에 들었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부정확하다. 현 애국가가 1907년에 작사되었기에 들었던 시기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영환 작사로 거론된 것은 1902년 학부에서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이다. 그러므로 장도빈은 현 애국가와 ‘대한제국애국가’를 혼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증언도 하였다. "당시에 안창호작 애국가를 여러 번 들은 일이 있는데 현행 애국가는 아니었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안창호작’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거국가’인지 아니면 1908년 2월호 태극학보 ‘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찬 愛國歌’인지, 또 아니면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 자 기사 ‘大韓魂’에 포함된 ‘애국가’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안창호 작사 애국가가 있을 수 있음을 유념하게 하는 동시에 현 애국가는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해 준 것이다. 김동욱의 증언은 출전이 없다. 조사자료를 꾸미는 과정에서 취합한 증언인듯하다. 당시 86세로 "기미년에 윤치호씨와 더불어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자는 민영환에 틀림없다”(8쪽)라고 하였다. 이 증언 역시 1902년 작곡된 ‘대한제국애국가’와 혼동한 듯하다. 이런 오해의 배경은 이 애국가 악보 서문에 "大師府會計局總長陸軍副將 正一品勳一等 閔泳煥”으로 되어있기 때문인 듯하다. 2. 안창호 작사설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작사설은 매우 관심을 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를 하게 한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먼저 두 가지 출전이 제시되었다. ‘도산안창호’(1947. 5 30 刊)와 ‘도산안창호웅변전집’(1950 5 20 刊)으로, 여기에서 네 단락을 인용하였다. ①"도산이 상해 임정시대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 부분을 ‘충성을 다하야’로 修正하였다.” ②"원래 이 노래는 도산의 作이어니와 이 노래가 넓리 불려져서 국가를 代身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自己의 作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云云” ③"애국가는 선생님이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對答이 없었다. 그러나 否認도 하지 않았다. 云云” ④"도산이 지은 노래는 여러 十篇이 있거니와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가장 잘 된 作品이라 云云”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은 모두 1947년 중반에 발행된 이광수가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에 배경을 두고 있다. 이것이 안창호설의 한계이기도 한데, 관련 자료들 간의 교차 검증을 하면 다음과 같다. ①은 ‘신한청년’ 창간호에 게재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수정되어 나오니, 이를 안창호가 수정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 단 수정 시점이 창간호 발행 시점인 1919년 12월 이전이라는 단서가 충족되어야 한다. ②와 ③은 같은 맥락의 증언이다. 이 문제는 안창호가 언제 작사했는가와 왜 자신이 작사했으면서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느냐 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기된 안창호 작사 시기는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 윤치호 교장에게 안창호가 지은 것을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얻어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은 윤치호가 애국가(찬미가 제14장)를 1908년 6월 25일 발행한 역술 <찬미가>에 수록한 이후라는 문제가 확인된다. 여기에다 "왜 자신이 작사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안창호의 겸양 때문이다” 또는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하여 널리 전파시키려는 의도에서다”라는 등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반론이 있는 상태이다. 그 하나가 조사보고서가 나오기 직전인 1955년 4월호 ‘신앙생활’에 밝힌 김인서(金麟瑞, 1894~1964) 목사의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안 선생이 창작했다면 직언했을 것이다. 성일관(誠一貫)의 안 선생이 역사의 대(大) 문자(文字)에 대해 겸양의 침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왜 원작자를 밝히지 아니했을까? 일제 압박 하에서 윤선생(윤치호)을 애국가 작자라고 밝히지 못한 것은 그의 신변을 염려한 것이요, 일제 위력 하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애국가 작자를 밝히면 애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도산 안창호>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사자료에서도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광수의 두 번째 부인 허연숙(許英肅, 1897~1975)이 1955년 4월 20일 자 자유신문에 증언한 것으로, 윤치호의 딸이 이에 대해 問議해와 이광수가 설명하여 해득시켜 보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반된 증언이 있다. 윤치호 작사설 자료에 수록된 주영환(朱榮煥)의 서면 증언이다. "이광수의 도산전기에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 씨라 한 것은 이광수의 실책이다. 출판 후 춘원은 안영자 씨를 통하야 訂正할 기회를 만들기로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광수는 반민족행위특별법에 의한 처벌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다 6,25 전쟁 혼란 와중에 납북을 당했다. 이런 상황임으로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는 처지를 말한 것이다. 이로서 안창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은 윤치호 딸의 오류에 대한 항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증거력이 상쇄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가족이나 친지의 증언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반드시 교차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안창호 측은 허영숙의 증언만을 거론하나 이 같은 대비로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전기소설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인데, 앞장 ‘도산 안창호’의 해악(害惡)‘에서 밝혔듯이 이 ‘도산 안창호’는 애국가와 관련해서는 이미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라는 점이다. 되풀이하지만 이광수의 글이라면 이렇게 파편적이고 탈맥락적일 수가 없는 데다 ‘살아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 내용이 생략된 사실에서와 같이 편집과정에서 가필과 삭제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어서 주요한(朱曜翰, 1900~1979)의 중장이 있다. 조사자료에는 두 가지 증언을 수록했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기고문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에서 제기한 것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는 상해에서 안창호가 ‘임금을 섬기세’를 ‘충성을 다하여’로 改作을 하였을 때 자신에게 問議(9쪽)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같은 조사자료 같은 항목에서 최남선이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11쪽)이라고 지적을 하였다. 이는 주요한의 나이가 20세라는 점으로 보아 최남선의 지적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대성학교 교원이었던 김동원(金東元)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다. 그 내용은 대성학교 시절 안창호가 윤치호의 ‘성자신손’(무궁화노래)을 ‘동해물과 백두산이’(애국가)로 개작하였다고 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선 여러 편의 글에서 밝혔듯이 대성학교가 개교하기 이전에 윤치호는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함에서 이런 주장은 원천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는 낭설인 것이다. 다음은 최일봉(崔日鳳)이 서면(書面)으로 제출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하나는 자신이 의주 강연에서 안창호가 자기가 지었다는 "애국가를 배워주었다 云云”이라고 한 부분이다. 또 하나는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안창호가 임정시절 내무총장 비서실에서 "이유필(李裕弼) 입회하에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는 내가 창작자야 하고 언명하였다. 云云”한 것이다. 전자는 자신의 경험이나 이의 진정성은 의문이 된다. 그리고 후자는 안창호설의 상투적인 주장이라 위의 김인서 목사 주장으로 답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영숙 씨의 증언을 살핀다. 두 가지를 인용했다. 하나는 ‘도산안창호’의 내용에 대해 윤치호 측에서 이광수에게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득하고 돌아갔다는 것과 자신이 진명학교 시절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고 하며 "도산이 作詞하야 愛蘭 민요곡을 부쳐서 부르다가 김인식 씨가 음악가로서 名聲이 있었으므로 作曲을 부탁했던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전자는 앞에서 교차 검증을 통해 살핀 바와 같고, 후자는 문맥상 애매하여 논의 할 필요를 갖지 못하나 김인식설의 배경 정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김인식 작사설 음악교육가 김인식(金仁湜, 1885~1963)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를 조사하게 되었을 때 크게 관심을 둔 인물이다. 직접 직원이 방문하여 증언을 청취하기도 했고,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 1935~)이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관심을 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인데, 하나는 1907년을 전후한 시기 여러 학교와 기관에서 지도한 음악가이고, 둘은 1955년 당시 작사설 거론자 중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에서다.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초기 상황에서 종횡한 음악가이다. 김인식은 1896년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 입학하고, 그 뒤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선교사 부인인 헌트(Hunt)와 정의여학교(正義女學校) 교장 스눅(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악전을 배웠다. 이후 바이올린과 코넷까지 배웠는데, 오르간 연주는 뛰어나 숭실중학 3학년 때 1학년 음악수업을 맡을 정도였다. 1907년 미국 유학 준비차 상경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여러 사립학교에서 음악지도를 요청받고 교사로 활약하게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부설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서양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진명(進明)·오성(五星)·경신(儆新)·배재(培材) 등 여러 사립학교에서도 서양음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인 경성합창단(京城合唱團)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적을 두고 활동하였다. 이런 활동상에서 애국가 작사설의 인물로 시선을 끌만 하였다. 조사자료에는 1908년에 진명여학교 창립기념에 쓰기 위해 ‘애국가’란 제목으로 작사를 하였다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박서양(경성합창단 단원)이란 학생이 부르는 ‘성자신손~ 운운’하는 "皇室歌(作者不明)를 듣고 이것에서 힌트를 얻어 작사·작곡을 하여 기념식에서 불렀고, 그 후 기호학교에서도 가리쳤다.”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7년 후에 작고하였음에도 작사자로 제외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1998년 발간한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상술하였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1907년을 전후한 당시 윤치호와는 YMCA 활동과 한영서원 하기 음악강습 교사 활동, 그리고 종교교회와의 관련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었다는 점. 둘째, 1910년 경신학교 교사 재직 시 <보중친목회회보> 창간호에 발표한 <애국가>가 무궁화가 가사에 자신이 작사한 것을 더하여 ‘올드랭 사인’곡으로 발표하며 ‘김인식 작사’로 한 바가 있다. 이것이 현 애국가가 아니라는 점. 셋째, 이 같은 사실을 생존 시에 밝히지 않았다는 점. 넷째, 작사자조사위원회의 출석 증언 요청을 거부하였다는 점. 마지막은 남긴 일기에 "찬송가에 손을 얹고 작사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일기를 쓴 일자가 작사자 조사 직후라는 점 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외 김인식설에는 김한규 고유상 홍만유, 그리고 당시 진명여학교 학생 3인의 증언도 있다. 이는 모두 ‘김인식 작사’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고, 김인식 작사의 다른 작품들과의 혼동에서 결과한 것이다. 한편 증언자 중 출판인 회동서관(淮東書館) 사장 고유상(高裕相)이 관심을 끌지만, "김인식 작 창가책 소형이 있었다”는 단순한 증언일 뿐이었다. 실제 김인식 명의의 악보집과 창가책과 악전(樂典)이 있지만 거기에 애국가는 들어있지 않았다. 여기서 김인식 작사로 발표된 애국가(KOREA)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애국가>(KOREA)는 8·6조 시형에 곡조는 ‘올드 랭 사인’이다. 이는 현 애국가와 같은데, 노랫말을 의외로 두 부분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一 華麗江山東半島는 우리本國이오 稟質됴흔檀君子孫 우리國民일셰 無窮花三千里 華麗江 大韓사람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셰(후렴) 二 愛國하는 義氣熱誠 白頭山과 갓고 忠君하는 一片丹心 東海갓치깁다 三 二千萬人오직한마암 나라사랑하야 士農工商貴賤업시 職分을다하셰 四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도으샤 萬民同樂萬萬歲에 泰平獨立하셰 총 4절에서 1, 2절은 김인식 작사이고, 3, 4절은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3, 4절이다. 이 1, 2절을 언제 작사하여 재구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는지는 모르지만 윤치호가 ‘찬미가 제14장’(현 애국가)을 작사한 1907년 중반 이전이라고 보게 된다. 이는 다시 밝히겠지만 화가 김은호의 회고록 ‘書畫百年’에 윤치호 작사 증언 부분에서 김인식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어 추정이 된다. 그런데 이 <애국가>는 일제강점기를 거처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것이 확인된다. ‘예술통신’ 1947년 2월 10일 자 ‘愛國歌 其二’로 나오는 것은 물론 몇몇 필사본에도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정황에서 확인하듯이 김인식은 당시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분명하게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가’에다 가사를 더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이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증언을 거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음악가로서, 생존 인물로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4. 최병헌 작사설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애국가의 본문은 최병헌의 ‘불변가’에서, 후렴구는 윤치호의 '황실가'(무궁화가)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소위 ‘윤치호·최병헌 공동작사설’의 인물이다.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최병헌 항목에는 최황(崔晃) 등 가족 2인의 명의로 제출한 자료가 요약되어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1905, 6년 경 정동 자택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작사했다. ②윤치호와는 독립협회 때부터 친교, ‘황실가’ 후렴을 빌려 ‘하나님이 보호하사’ 애국가를 작사했다. ③윤치호는 기독교인이 아님으로 이런 표현을 쓸 수가 없다. ④윤치호는 최병헌의 권유(勸誘)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작고 28년 후의 후손들이 제출한 자료이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③과 ④같은 내용은 어불성설이다. 윤치호는 최초의 감리교 세례교인으로 최병헌 보다 입교가 12년이 앞선다. 최남선이 이를 교정시켜 주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 회장 시기 최병헌은 주사직에 있었다. 가족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알 수 있다. 이를 견준다면 앞의 두 가지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도 있다. 12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사상과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 1896년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協成會) 청년부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도 소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후 위의 인물들과 정치 토론을 벌이며 근대화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나 불량한 학생으로 오해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여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률학을 공부했다. 1911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1년 만인 1912년 식민지 현실에 분개하여 다시 망명을 하려 했다. 이에 윤치호의 권고로 망명을 단념하고, YMCA 이사가 되고, 배재학당 교장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이력에서 작사자에 대한 코멘트를 할 만한 동시대 지식인임은 분명하다. 조사자료에는 자신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에 14세로 참가하여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다고 하였으며, 작사자에 대해 이런 증언을 하였다. "1903년부터 1911년까지 滯美 中에는 안창호작이라 들었고, 귀국 후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들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가 발행된 시기 직후 미국과 하와이에서는 신한민보 등에서 애국가 또는 ‘국민가’(동일 가사)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표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언에 가치를 둔다면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5. 윤치호 작사설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교육자·정치가·저술가·개신교 운동가·계몽 운동가·언론인·독립협회·만민공동회·신민회·청년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개화파로 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한 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운동, 민권운동, 의회설립운동을 벌이고, 황제에게 불충(不忠)하는 역적으로 취급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제경찰의 미행과 내사 등을 견디지 못해 친일로 전향하였다. 애국가 작사 문제는 문헌과 증언과 상황이 확정에 이르는 단계이지만, 친일 프레임에 발목을 잡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다. 윤치호작사설 항목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네 개의 그룹인데, 하나는 한영서원 제자들의 증언, 둘은 가족의 주장, 셋은 지인들의 주장, 넷은 평론가 또는 제3자의 증언이다. 이제 각 측의 주장과 앞의 네 작사설을 교차검증하여 증거 자료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한다. 한영서원 제자 신영순(申永淳) 외 3인의 증언이 비중 있게 수록되었다. 우선 ‘特別讚美歌集’ 즉, 초판 ‘찬미가’의 존재를 알려 준 것으로 의미가 크다. "제1장이 국가(영민요곡), 제2장이 황실가(영민요곡)이고, 그 다음이 독립가와 신병가 등이었는데, 곡조는 찬송가 곡이었다”라고 하여 재판과는 다른 편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첫째 제1장이 국가(KOREA), 제2장이 황실가로 편제된 점, 둘째 재판 ‘찬미가’에 없는 찬송가 곡조의 ‘독립가’와 ‘신병가’가 수록된 점, 셋째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이상의 세 가지를 들어 재판과 다른 초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특히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아 작사 시점이 1907년이란 점을 보강해주기도 한다. ‘찬미가’ 초판은 1906년 10월 ‘한영서원(韓英書院)’ 개교 첫 입학생 14명에게 배포하기 위해 소규모로 출판을 했고, 1907년 작사한 현 애국가 외 2편의 ‘애국적 찬미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포함하여 재판을 1908년 6월에 발행하였다. 이의 존재를 바로 한영서원 학생들의 체험적인 직접증언으로 확인시켜 준 것이다. 이어서 1913년 "창가를 수집하여 비밀로 노래책을 출판하였다가 투옥되고 압수를 당했는데. 제1권 제1장 ‘애국가’에는 윤치호 작이라고 명기 되었다”라는 증언도 있다. 이 창가집의 실물이 없어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노래책에 대한 ‘창가책사건’ 관련 기록에는 ‘윤치호 작 애국가’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실로 받아드일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최규남의 증언 역시 매우 구체적이다. 9세로 한영서원 다닐 때의 경험을 진술한 것인데, "한영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부치고 선생 朴嶼陽(강화출신)씨가 우리에게 가리켜주며 이것은 윤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제자 김동성도 50년 전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며 "학생들은 매일 아침 윤선생(윤치호)이 만든 애국가를 불렀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두 명의 또 다른 제자는 ‘唱歌集’과 ‘讚美歌冊’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윤치호 역술 ‘찬미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혼동을 한 부분으로 판단된다. 다른 인물들의 작사설과는 다른 전문가의 증언이 있다. 박은용과 주영환이다. 평론가 박은용(朴殷用)은 동아일보 1948년 10월 6일 자 ‘愛國歌考’에서 윤치호가 1945년에 남긴 ‘자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통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 주장은 1947년 발행한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안창호’의 오류를 이미 7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윤치호 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를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선생 작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좌익계 음악평론가의 이 질타는 친일파 척결이라는 첨예한 시점에서 시류에 따라 안창호가 민족지도자라는 이유로 애국가 작사자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것이다. 주영환(朱榮煥)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들어 윤치호 작사 사실을 주장했다. 하나는 기자협회보 3호에 서정주가 쓴 ‘청년 이승만’에 "이승만 박사로부터 친히 口傳을 받은 筆記”에 근거하여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한 사실, 둘은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4장에 현 애국가가 수록되었다는 점, 셋은 윤치호 자손이 이광수에게 정정을 요청했다는 사실이다. 이 세 번째는 앞의 안창호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의 증언을 상쇄시키는 것으로 의미가 큰 증언이다. 윤치호작사설에 특이한 두 인물의 주장도 있다. 백락준과 최남선으로, 백락준(白樂濬, 1895~1985)은 애국가 작사자 조사를 주관한 문교부 전임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증언은 서울신문에서 밝힌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자신이 윤치호로부터 직접 받은 ‘찬미가’를 통해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찬미가’를 6.25 때 분실했다고 하였다. 당시 조사위원회에서는 이 책을 찾는다는 기사를 낼 정도로 결정적인 증거력을 지닌 자료였다. 최남선의 증언은 간단명료했다. 그러나 매우 큰 효력을 발휘한 증언이다. 윤치호 가족 측에서 1945년 작성한 ‘자필 가사지’의 ‘一九0七年 尹致昊 作’ 표기 문제, 철자법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이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다. "<一九0七 尹致昊作>이 眞이라면 윤 씨 작이라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1907년 윤치호 작’이란 표기는 가사를 쓴 시점이 아니라 작사를 한 시점을 밝힌 것이기에 서법에 문제가 없다는 것, 그리고 윤치호가 이른 시기에 어문법에 관심을 보인 인물임으로 역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자필 가사지’가 윤치호가 직접 쓴 진적(眞籍)이라면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이 최남선의 증언은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유지된 기조이다. 첨언한다면 최남선은 조사자료 ‘애국가의 종류’에서 ‘대한제국애국가’와 현 애국가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밝혀 전문가적인 소견을 피력한 인물이다. 윤치호작사설 주장의 의미 있는 그룹은 윤치호 가족들이다. 사위 정광현, 이복 동생 윤치왕이 그들이다.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윤치호의 셋째 사위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작사자 조사 기간 두 번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할 만큼 적극적인 활동을 한 가족 일원이다. 조사자료에는 ‘찬미가’ 재판의 존재를 제시하고, 1945년 작성된 윤치호의 ‘자필 가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佐翁 筆跡의 애국가는 1945년 作故하기 전에 가족들의 請으로 讚美歌集에서 베낀 것이다. 謄寫할 때 綴字法도 多少 고치고 또한 ‘임금을 섬기며’의 句는 이미 改作한 것이라 하야 現 歌詞로 고쳐 썼다.” 윤치호 작사 사실을 입증하는 가장 증거력이 큰 사료인 ‘자필 가사지’의 작성 배경으로 의도적으로 남긴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청에 의해 기념으로 남긴 것이란 사실을 밝힌 것이다. 더불어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중 "님금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이유에 대해 가족들이 바뀐 부분 대로 쓸 것을 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서 <찬미가> 제14장과 차이나는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윤치왕은 1907년 "애국가 ‘백두산이’(영국민요)를 지어 학교에서 부르고 소책자로 박어서 분배”했다고 ‘찬미가’의 존재를 증언했다. 이상에서 살핀 5인에 대한 작사설을 조사하기 위해 작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를 분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 조사자료는 1955년 4월 2일 자 경향신문 기사로 촉발되어 5월 13일 자료집을 발간하고 조사가 시작되어 1956년 8월 31일 최종회의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는데 활용하였다. ②작사자로 거론된 인물은 윤치호 안창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인이며 단독작사설 합작설 개작설이 있었다. ③주요 내용은 애국가 화창(和唱) 사례, 애국가의 종류, 작사설, 부록, 참고문헌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④ 각 작사설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민영환 설은 1902년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 1916) 작곡 ‘대한제국애국가’ 악보집 서문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에 대한 오해로 비롯되었다. 최병헌 설은 ‘불변가’라는 시에서 남산을 본 감상을 더해 작사했다고 하나 이 원작은 확인이 되지 않아 가족들이 제기한 설일 뿐이다. 음악가 김인식의 작사설은 윤치호의 ‘무궁화가’ 3,4절에 자신이 지은 1, 2절을 구성해 1910년 발표한 ‘愛國歌’(KOREA)를 오해한 제자들 유포한 설에이를 철회하지 못한 본인이 주장한 설이다. 안창호 설은 이광수가 지은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되었다.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로 윤치호가 교장으로 왔을 때 안창호가 지은 현 애국가를 보여주고 양해를 받아 발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창호가 윤치호에게 보여주고 후렴을 사용하는 것에 양해를 얻었다는 시점이 이미 윤치호가 작사하여 역술 ‘찬미가’에 수록, 발간한 이후여서 시점이 문제가 된다. ‘찬미가’가 발행된 것은 3개월 전이 1908년 6월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소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데, 바로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의 애국가 관련 기사의 탈맥락상과 연동이 되는 것으로 안창호 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역시 대성학교 학생들과 임시정부 관련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설인 것이다. 윤치호 설은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만으로도 작사 사실을 확정할만하다. 홍색 표지의 초판과 재판 역술 ‘찬미가’가 제시되었고, 1945년 작성된 ‘자필 가사지’까지 제시되었다. 또한 한영서원 제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있고, 가족들의 확신으로 자료가 제시된으로서 작사 사실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거론한 이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활을 하여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실 한 두 가지의 자료만으로는 그 진실을 주장하기에 부족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증거자료와 증언의 부합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는 거의 윤치호가 작사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1년 6개월간의 3차에 걸친 조사위원회 회의는 이 자료집에서 제시한 윤치호 관련 자료와 증언의 교차검증 과정이기도 하였다.(물론 조사과정에서 1910년 신한민보 ‘국민가 윤치호 작’ 자료 등 확인) 이런 점에서 이 자료집은 윤치호 작사 사실을 확정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집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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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Ⅳ 찬미가 ‘Patriotic Hymn’의 전승 과정현 애국가의 출현은 1908년 6월에 발행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 재판에 수록됨으로서 이다. 제15쪽 ‘Patriotic Hymn(Auld Lang Syne) 뎨十四’이다. 그런데 이 책이 재판(再版)임으로 초판 발행은 한영서원을 개교한 1906년 10월 전후로 본다. 그런데 윤치호가 1945년 작고 직전 자필로 남기 가사지에 ‘1907년 작’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이 초판에는 현 애국가가 수록되지 않았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작사 시점도 1907년부터 1908년 6월 어간이라고 보게 된다. 이렇게 출현한 ‘찬미가’ 제14장 현 애국가는 또 하나의 애국가에서 대표적인 애국가로 확정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상과 이 마 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애국가 가사 4절의 면모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나 일반인들에게도 국가 안녕과 독립에 대한 기도문으로 통하여 자연스럽게 연계, 수용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궁화 노래’와 일정 기간 까지는 길항(拮抗) 관계로 불리다가 3.1운동기를 계기로 대표적인 애국가가 되었다. 2) 1910년 9월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 一. 동물과 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ᄂᆞ님이 보호ᄒᆞ샤 우리 대한 만세 (후렴) 무궁화 삼쳔리 화려강산 /대한사ᄅᆞᆷ 대한으로 길히 보전ᄒᆞ세 二. 남산우헤 뎌 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ᄅᆞᆷ이슬 불변ᄒᆞᆷ은 우리 긔샹일세 三. 가을하ᄂᆞᆯ 공활ᄒᆞᆫ데 구름업시 놉고 /발근 달은 우리 가ᄉᆞᆷ 일편단심일세 四. 이 긔샹과 이 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ᄅᆞᆼ하세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기관지 ‘신한민보’ 제1면에 ‘국민가’라는 곡명으로 게재된 전4절 가사다. 주목되는 것은 ‘윤티호 작가’라고 밝혔다는 사실이다. 이는 애국가 자료를 게재한 매체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작품 자체를 소개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제1면에 가사 전4절과 함께 작사자를 밝힌 것이다. 매우 의미 있는 전승기록이다. 찬미가 제14장과 다른 점은 ‘아래 아’ 표기를 했다는 점과 4절 ‘님군을 섬기며’가 ‘민족을 모흐며’로 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14장을 텍스트로 하지 않고, 구술에 의한 것으로 보게 한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곡명이 ‘국민가’로 변이 된 점이다. 이는 ‘국민회의 회가(會歌)’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고쳤다고 보게 된다. 더불어 제4절 ‘님군을 섬기며’도 국권 상실로 임금이 없음으로 ‘민족을 모으며’로 수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3) 1912년 간도 용정촌 애국가 간도 용정촌 국자가(龍井村 局子街) 한인의 소지품을 일본총영사관이 압수, 보고한 자료에 들어있는 애국가이다. 이 창가집에는 소년보국가·운동가·한반도가·대한혼가·부모은덕가·학도가·혈성대가·영웅모범가·조국생각과 함께 애국가가 들어있다. 일본어로 번역하여 보고한 애국가는 후렴구 1절 마지막 구절이 ‘우리민족 만세’로, 마지막 구절이 ‘길이 광복하세’로 되어 있다. 후렴구 일부를 변이시킨 것은 의외이다. 4) 1914년 「태평양잡지」 애국가 이승만(1875~1965)이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창간한 월간 「태평양잡지」 1914년 4월호에 ‘애국가와 찬미가’라는 기사에 수록된 자료이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 입수되어 확인 되었다.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라고 밝힌 자료이다. 「찬미가」를 언급하면서 "무궁화 곡조에 다른 말로 만든 것”이 애국가라고 하였다. 특히 애국가의 탄압 실상을 밝히고 있는데, "찬미가는 본국에서 압수하고 매매를 금지한 책인데 한 권을 우리가 얻었기로 대강 뽑아서 등재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차 노래를 애국제도로 모본하여서” 국내에서 찬미가를 압수하고, 애국가를 금지했음을 전했다. 이 시기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투옥(1913~1915)돼 있었다. 국내에서는 이를 기사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어 소유자들이 스스로 폐기, 희귀해졌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5) 1915년 간도 광성중학 교재 수록 애국가 중국 간도 소영자(小營子)의 광성중학교(光成中學校)에서 1914년 간행한 「최신창가집」을 일제가 입수하여 보고하였다. 이 책 첫 작품이 ‘國歌’라는 제목으로 애국가 가사를 싣고 있다. 신한민보의 ‘국민가’와 유사하다. 다른 점은 제1절 ‘하나님이 보호하사’가 ‘한아님이 보우하사’로, ‘우리 대한 만세’를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업시 놉고’를 ‘놉고 구름업시’로 변이시켰다. 그런데 "찬미가" 4절의 ‘님군을 섬기며’를 신한민보 ‘국민가’와 같이 ‘민족을 모으며’로 하였다. 이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신한민보 ‘국민가’가 소영자에서 불린 것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소영자에서 국민가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1916년 하와이 발행된 「애국창가집」 애국가 표지에는 ‘愛國歌’로 등사되어 있고, 목차 다음에 <애국창가집 서문>이 실려 있다. 판권의 간행일자는 1916년 5월 13일로 되어 있어 1915년 국내 한영서원에서 간행된 "창가집"을 바탕으로 편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사 1절은 ‘하ᄂᆞ님이 보우ᄒᆞ샤’, ‘우리나라 만셰’로, 3절은 ‘구름업시 높고’로, 4절은 ‘님금을 섬기며’로 되어있다. 7)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 소재 애국가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기리 보전하세 2. 남산 우에 저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기상일세 3. 가을하늘 空闊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기상과 이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김규식 중심의 조직인 상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속표지에 수록된 전 4절 가사이다. 각 절의 변이 상이 확인 된다. 이 가사는 이후 상해임시정부에 계승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기록이다. 이 잡지의 편집자는 주필 이광수이다. 당시 상황으로 보아 안창호의 자문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제14장의 전승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주목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신한청년’에 게재된 애국가 가사의 변이는 2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부 자구가 바뀌었다. 1절의 ‘보호’가 ‘保祐’로, ‘우리 대한 만세’가 ‘우리나라 만세’로, 3절의 ‘구름없이 놉고’가 ‘놉고 구름없이’로, 4절의 ‘님군을 섬기며’가 ‘충성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다. 오늘의 애국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변이상 중에 ‘충성을 다하야’라고 바뀐 부분은 예사로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하나는 이 부분을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가 수정하였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 수정이 이미 1910년에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임정시절 안창호와 가장 가까웠던 주요한이 "상해 임정 초기 안창호 선생이 수정하였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미 1910년 미주 신한민보 ‘국민가’에서 ‘충성을 다하야’로 수정되어 나온 다는 사실에서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결국 시기와 지역이 거짓이 되는 것이고, 이 혼란의 주체가 안창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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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안창호 가족들은 알고 있다”1980년대 들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간행물들이 영인출판으로 공개되었다. ‘아세아문화사’를 선두로 많은 출판사가 잡지와 신문 등을 복각(復刻)하였다. 이를 통해 국학분야는 근대에 대한 연구의 진척을 볼 수 있었다. 애국가 분야 같은 특수 분야도 마찬가지다. 특히 ‘독립신문’의 복각 출판으로 구한말의 애국가 운동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5년만의 준비로 1987년 독립기념관의 개관을 계기로 해외 산출 자료의 대량 수집, 공개로 독립운동사 분야는 물론 인접 부야도 큰 혜택을 보는 계기였다. 애국가 분야로서는 임시정부와 안창호와 안익태 자료의 전모를 통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미주 ‘신한민보’ 완질(完帙) 입수를 통해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 시기와 악보와 음반 발행 시기를 알게 되었고, 안창호의 유품을 통해 가족들의 인식 여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가 분야에는 두 가지 현상이 있게 되었다. 하나는 안창호에 대한 자료가 집대성 되어 그의 애국시가(愛國詩歌) 전모가 드러난 것이고, 또 하나나는 안창호 연구가 활성화 되어 애국가 작사설이 다시 대두하게 된 점이다. 이 결과로 안창호의 애국시가 중에 잡지와 신문 소재 "애국가” 곡명의 두 작품을 확인하여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가 따로 있었음을 밝혀냈다. 바로 안창호는 다른 애국가 작사 사실 때문에 현 애국가의 작사자로 오해를 받게 되었고,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이번 회에서는 이 사례와 유사한 안창호 가족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검토하기로 한다.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1884~1969) 여사가 1962년 정부 초청으로 건국공로훈장 수훈차 귀국을 했다. 이 때 흥사단 기관지 ‘기러기’는 이혜련 여사와의 인터뷰를 수록했다. 이를 통해 가족관계는 물론, 흥사단 창립과 3·1운동, 서재필과의 교류, 이갑(李甲)선생의 엄지손가락 마비 사실 같은 것도 기술했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한 미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한 큰아들 필립이 1960~70년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잡지와 인터뷰를 하면서도 ‘거국가’만 언급을 했을 뿐이고, 애국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가족들이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큰딸 수산의 경우는 조금은 다르다. 2003년 펴낸 책 ‘버드나무 그늘 아래-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 이야기-’에는 21개 에피소드를 담고 의외로 참고문헌을 첨부했다. 그리고 ‘도산 선생’ 외 3개 항목에 아버지와 가족 이야기를 기술했다. 여기에서 ‘거국가’ 4절 가사 제시했고 애국가도 두 번이나 언급을 했다. 첫 대목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직후 부친이 평양 대성학교에서 체포되어 용산 감옥에 수감된 후의 상황에서다. 밤이면 감옥 근체에 대성학교 학생들이 와서 부친이 듣도록 ‘올드랭 사인 애국가’를 불렀다고 하였다. 이 기술은 이미 다른 증언에서 알려진 에피소드로 단순한 애국가를 부른 정황을 전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이미 개교 당시부터 교장인 윤치호가 작사한 현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음은 ‘감옥 속의 아버지’라는 항목에서 1926년 2월 장리욱이 자택으로 찾아온 날을 회상한 열한 살적 기억이다. "월슨 꼭대기에서 아버지는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와 장리욱은 건너편 산골짜기 아래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서는 목청껏 애국가를 불렀다. 장난치던 아이들도 나무줄기를 향해 돌을 던지던 놀이를 멈추고선 친숙한 올드랭 사인의 멜로디에 조선말 가사를 붙인 노래를 듣기 위해 조용히 서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아버지가 울고 있어, 다 울고 있어··· 아버지가 왜 우는 거지? 아이들은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산의 인격과 생애’의 저자 장리욱과 안창호의 친밀 관계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위 두 대목에서 애국가 작사자 여부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족들도 작사자가 부친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런 진술은 나름 진정성이 있는 상황임으로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애국가 작사자 문제가 격렬하게 전개된 2000년대의 기록은 학습된 정보로 보게 된다. 애국가 작사자 문제로 방문한 이들로부터 주입된 정보로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여 주는 자료가 있다. 그것은 1915년 아들 필선에게 보낸 서신의 일절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차남 필선에게 보낸 엽서이다. 가족의 안부를 묻고 차남 필선을 격려하는 내용이다. "필션아 네가 이져음에도 마취(march)를 잘하며 동해물과 백두산도 잘 부르느냐 나는 잘 잇노라” 어린 아들에게 행진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씩씩하게 자라라고 격려했다. 이런 정도인데도 애국가를 자신이 작사했음을 숨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후 가족 누구도 6, 70년대 귀국하여 애국가 작사자가 부친이라고 말 한 바가 없다. 이는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작사자에 대해 말 하지 않은 결과이다. 결론은 이렇다. "안창호는 가족들에게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작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창호는 애국가(국가)의 기능을 알고 있기에 아들에게까지 부를 것을 독려하였다. 안창호는 지극한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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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2의 ‘안창호 애국가’나라 사랑을 권면(勸勉)하는 노래 즉, 애국가를 짓고 부르기를 권장하고 지속화 할 것을 독려하는 것을 ‘애국가 운동’이라고 한다. 독립신문이 1896년 9월 22일자 기사를 통해 외국의 예를 제시하고 조선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제안 것이 그것이고, 지속적으로 애국가 가사를 투고 받아 게재한 것이다. "~조선정부 학교에서들 국기를 학교 마당 앞에 하나씩 세워 매일 학도들이 그 국기 앞에 모여 경례하고 애국가 하나를 지어 각 학교에서 이 노래를 아침마다 다른 공부하기 전에 여럿이 부르게 하고~” 국기에 대해 경례하고 애국가를 부르게 함으로서 나라 사랑하는 자세를 갖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국기(國旗)’에 조응하는 것을 ‘국가(國歌)’라 하지 않고 ‘애국가’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독립신문이 창간으로부터 5개월 후쯤이라는 시점에서 국기 ‘태극기’는 있지만 국가는 없음으로 그 대안으로 ‘애국가’를 지어 부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둘은 이미 국가 대신으로 부르는 ‘애국가’가 있으니, 이 전통을 따라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창호가 귀국하여 활동하는 1907년 3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國旗禮拜’에서는 이와 유사한 해석을 하게 한다.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한다고 했기 때문인데, 인용하면 이렇다. "~美國 留學生 안창호씨가 生徒에게 對하여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種 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每日 上學 前에 國旗에 禮拜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 즉~” 서울 서대문 근처 의무균명학교에서 행한 강연회에 대한 보도의 문면(文面)대로라면 안창호도 미국의 국기에 조응하는 국가를 ‘국가’가 아니라 ‘애국가’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애국가’는 국가가 아님으로 각자 지어 부를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지난 회에 살핀 ‘찬애국가’이고, 이번 회에서 살피려는 또 하나의 안창호 작사 애국가의 존재이다. 안창호는 입국하여 이미 국가로 부르는 ‘애국가’가 있음으로, 같은 명칭이지만 각자의 또 다른 애국가를 지어 부르자고 한 것이다. ‘제2의 안창호 애국가’는 신한민보 1910년 10월 12일자 ‘대한혼’에 포함된 ‘애국가’이다. 먼저 ‘대한혼’ 대목을 전재하고 ‘애국가를 살피기로 한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大韓魂 지금 아목따에 있난 어뜬 동지의 긔함을 본즉 년 전에 평양 어뜬 지사가 애국가 일편을 지어 각 학교에셔 학도에게 가라치더니 학도들이 날마다 이 노래로 나라사랑하난 마음과 나라회복할 생각이 바다에 됴수 밀듯하난 고로 원슈들이 교과서 까지 압슈 하얏슬 뿐 아니라 즉금은 입으로 외오지도 못하게 하난 고로 이와 같이 보배스러운 노래(곧 대한혼)가 세상에 널리 전치 못할까 근심하야 글로써 보내니 속히 기재하야 우리 우리동포에게 널리 젼하라 하얏더라. 이 노래난 의기를 자아내고 마암을 모와서 원동력을 생기게 하난 재로 우리동포들은 이 노래 하야 후일을 예비할지어라.” "평양 어뜬 지사”는 안창호이고, 그가 "애국가 일편”을 지어 부르게 하였다고 했다. 이 기사 자체가 웅변투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 안창호의 구술을 기사화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대한혼’을 담은 세 가지 노래 중 ‘애국가’ 일편을 수록했다. 전 10절의 긴 노래이다. <애국가> 1 슬프도다 우리민족아/ 사천여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하더니/ 오늘날 이지경 웬일인가 열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우리의 손으로 끊어버리고/ 독립만세 우리 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켔네(후렴) 2 일간두옥도 내 것 아니요/ 수묘전토도 내 것 못되네 무리한 수욕을 대답 못하고/ 공연한 구타도 거져 밧노라 3 남산초목도 눈이 있으면/ 비창한 눈물이 가득하겠고 동해에 별도 마음이 있으면/ 우리와 같이 슬퍼하리라 4 한치 벌레도 만일 밟으면/ 죽기전 한번 움직거리고 조그만 벌도 남이 다치면/ 저를 반드시 쏘고 죽는다 5 눈을 들어 살펴보니/ 삼천리 강산에 사무친 것은 우리 부모의 한숨 소리요/ 우리 동포의 눈물이로세 6 금수강산이 빛을 잃고/ 광명한 일월이 아득하도다 이것이 뉘 죄냐 생각하여라/ 네 죄와 내 죄 까닭이로다 7 사랑하는 우리 청년아/ 자든지 깨든지 우리 마음에 나태한 악습과 의뢰 사상을/ 모두다 한 칼로 끊어버리고 8 사랑하는 우리 동포야/ 죽든지 살든지 우리 마음에 와신상담을 잊지 말아서/ 우리의 국가를 회복합세다 9 애국정신과 단체 힘으로/ 육단혈류를 무릅쓰면서 원수가 비록 산과 같하되/ 우리 앞을 막지 못하리 10 독립기 달고 자유종 칠 때에/ 부모의 한숨은 웃음이 되고 동포의 눈물은 기쁨 되리니/ 중흥영웅이 우리 아닌가 위에서 확인하였듯이 안창호는 애국가 운동에 앞장 선 인물이다. 그 실증이 강연에서 애국가의 필요성과 학교에서 실천하도록 독려한 것이고, 실제 지은 애국가를 통해 알 수가 있다. 결국 안창호는 이 <애국가> 작사 때문에 1907년 윤치호 작사 ‘애국적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의 작사자로 오인 받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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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안창호 작사 애국가, “따로 있다”안창호의 글과 구술 자료는 ‘도산안창호전집’ 도산안창호전집, 총 14권, (사)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2000에 수록되었다. 이 중에 안창호의 세 가지 필명이 확인된다. 하나는 ‘산옹(山翁)’, 둘은 ‘섬뫼’, 마지막은 ‘애국생(愛國生)’이다. ‘산옹’은 주요한이 창간한 잡지 ‘동광(東光)’ 16호에 발표된 ‘合同과 分離’라는 글로부터 14회를 이은 글에 쓴 필명이다. 구술을 이광수가 윤문하여 발표한 것인데, 일제의 눈을 피해 내용 일부를 빼며("事勢不得이 빼 먹은 곳이 많습니다. 그리 알고 보아 주십시오”)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 1926년 11월호에 ‘山翁을 그리면서’라는 글을 통해 분명히 안창호의 필명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섬뫼’는 ‘島山’의 우리말 표현이다. 이 쓰임은 역시 ‘동광’ 1926년 6월호 외 세 편의 글에서 쓰인 것이다. 스스로가 썼다고 볼 수도 있고, 편집자가 발표자의 신변 보호를 하기 위해 쓴 것일 수도 있다. 마지막 ‘애국생’은 두 가지 자료에서 확인 된다. 1908년 ‘태극학보(太極學報)’ 3월호(제18호) 소재 ‘讚愛國歌’의 필자로 쓴 것으로, 이것이 안창호의 필명이란 사실은 ‘신한민보 新韓民報’ 1943년 11월 5일자 ‘애국지사의 노래’에서 확인이 되었다. 이 중 살피려는 것은 ‘애국생’이란 필명으로 안창호가 발표한 ‘讚애국가’이다. 그런데 이는 의미상 이미 존재하는 어떤 애국가를 기리는 뜻으로 지은 또 하나의 애국가인 셈이다. 이 작품을 수록한 ‘태극학보’는 1905년 일본 도쿄에 설립된 서북지방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태극학회가 1906년 10월 창간호를 발행한 잡지이다. 처음에는 후배 유학생들의 편익을 도모하고 선후배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기관지로 발전하여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윤주(李潤柱), 문일평(文一平) 등의 의연금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회원의 의연금과 학보 판매금, 유지의 찬성금(贊成金)으로 발행하였다. 1907년 7월에는 175명의 인사들이 한꺼번에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편집에는 김낙영·김홍량(金鴻亮)·김지간 등이 관여했다. 배포 지역이 넓었다. 일본, 서울 및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사(共立申報社)를 통해 미주에도 배포되었다. 학보는 대개 논단·강단·학원(學園)·문예·잡보·기서(寄書)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논단에는 국내 현실과 애국적인 논설을, 강단과 학원에는 계몽적인 학문의 소개를, 문예에는 문학작품을, 잡보에는 유학생의 활동과 국내외의 정세를 실었다.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 만큼 계몽적인 학술내용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논설류도 많았다. 특히 제10호에 이원익(李源益)의 ‘愛國歌’ 등을 수록하여 발행 목적을 실현하였다. 또한 안창호에 대한 활동상을 수록하고 작품을 게재하기도 했다. 바로 ‘찬애국가’가 그 하나이다. 그렇다면 안창호가 이 ‘찬애국가’를 발표하게 한 원래의 애국가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윤치호의 ‘애국적 찬미가 제14장’, 즉 현 애국가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07년 초 귀국하면서 관심을 보인 것이 국가상징의 하나인 국가(애국가)였다. 그런데 이미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 전파된 애국가가 있었던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함께 교육사업을 하고자 하는 윤치호 작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찬하며 자신의 애국하는 노래를 지은 것이다. 찬愛國歌(찬성시 하나님 가히로 同調) 愛國生 이상의 안창호(애국생) 작사 ‘찬애국가’는 두 가지 점에서 의의가 큰 작품이다. 하나는 1908년 2월 이전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등에서 부르고 있는 윤치호 작사 현 애국가의 존재를 안창호가 인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안창호 역시 독립신문이 주도한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에 늦게나마 참여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결과는 의외로 안창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오인하게 한 것이 된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다. "안창호의 애국가 작사설의 원천은 1908년 3월 태극학보에 발표한 또 하나의 애국가인 ‘찬애국가’의 존재를 오인한 결과이다. 안창호 작사 애국가는 별개이다. 그러므로 현 애국가의 작사자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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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쇄본 애국가 가사 전승 실상현 애국가의 전승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도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대와 출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필사 자료보다는 인쇄본 자료를 통해 살필 필요가 있다. 필사본은 유일본일 경우 진정성 측면에서 가치가 있지만, 대개 사적 기록이란 점에서 필사 시점과 기록 배경이 명확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인쇄본은 단행본의 경우 판권을 통해서, 잡지나 신문은 발행 일자나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상업적 매체의 성격에 따라 게재 내용의 배경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인쇄본은 전승 년대, 즉 수직적 전승 과정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과 객관적 대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채택하게 된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인쇄본 애국가 가사 자료는 대략 다섯 종 정도로 볼 수 있다. 첫 문헌 기록은 연활자본 1908년 재판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이다. 이 문헌은 현재까지 역술자(번역과 작사자)와 인쇄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진 최초(最初)의, 최고(最古)의 문헌 소재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수록(인쇄) 시점, 작사자 기록 여부, 곡명의 차이, 표기법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이 판본은 1908년이란 시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윤치호가 직접 ‘자필 가사지’를 통해 밝힌 ‘1907년 작사’ 후 재판 ‘찬미가’에 수록한 것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현대철자법으로 표기하였다. 舊철자법(국어정서법)이 아닌, 1937년 이후 쓰게 된 오늘날의 철자법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사자 윤치호의 선각자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필 ‘가사지’와 함께 이미 철자법을 30여 년 앞서 ‘아래 아’같은 구(舊)철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이 표기 문제는 1955년 애국가작사자 조사 때는 물론 최근까지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윤치호는 ‘독립신문’ 편집에서부터 ‘찬미가’ 발행 때까지 언문일치를 실현하여 ‘아래 아’ 같은 표기를 철폐하여고 띄어쓰기를 계몽하였다. 1907년 학부에서 7월 8일 개설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에서 ‘ㅣ’와 ‘ㅡ’의 합음으로 ‘ㅏ’(阿)음과 같음으로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사촌 동생 윤치오(尹致旿)이다. 이 기관은 주시경과 지석영 등을 위원으로 구성하여 약 3년 동안 한국어 정서법 통일을 토의한 곳이다. 이 연구소 설립과 연구는 당연히 윤치호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 윤치호의 한글 사용과 그 표기에 대한 앞선 실천의지는 외무아문 참의로서 통역업무를 맡았던 시절의 한 회고에서 확인이 된다. 즉, 영문을 번역하거나 통역하는데 난삽한 한문을 쓰는 것보다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함을 안 것이다. "언문을 보급시킬 생각만은 간절하여 나라의 형편을 공사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또한 언문을 보급하여야 조선 사람이 속히 깨이겠다는 뜻을 누차 진언하였다.” 당시 미국공사도 긍정하여 외무독판 김홍집에게 외교문서에 언문을 사용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조선 언문을 못 배웠소.”라고 강하게 거부하여 실천하지 못했다는 회고이다. 분명한 한글 사용론자의 면모이다. 이런 위치였음으로 1907년 한영서원과 뒤 이어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언문(諺文)이라는 일부 계층어를 일반 국민어(생활어)로 전환시켰고, 말하기와 쓰기의 일치, 즉 언문일치를 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작사자 표기 여부이다. 이 ‘찬미가’ 재판 판권에서 "譯述者 尹致昊”로 나온다. 이 기록은 일부의 주장처럼 ‘번역자’로, ‘편집자’로, ‘감수자’로 해석을 하든 윤치호가 첫 인쇄 기록자란 위치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후의 문건과 증언 등에서 "작사자 윤치호”로 말하고 기록하고 있다면, ‘역술자’에 대한 번역은 ‘譯’과 ‘述’, 즉 "일부의 번역과 일부의 지음”의 합성어로 보아야 제14장을 비롯한 2편은 작사로 보는 것이 옳다. 만일 살핀 세 가지 의미로 쓴 용어라면 각각의 용어가 더 간명하고 정확한 표기인데, 왜 실용주의자이며 한글 사용론자이기도 하고, 이런 용어를 쓰는 다른 나라를 유학한 인물이 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함부로 썼겠는가. 2.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이 자료는 1910년 9월 21일 자 미주지역 교민신문 신한민보 소재 ‘국민가’(윤티호작) 신문 활자본 4절 가사이다. 기사 내용의 전후 맥락으로 작사 후 3년 ‘찬미가’ 발행 2년 후라는 시점은 분명하다. 노래로든, 출판물에 의해서든 유포, 확산의 맥락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애국가’나 ‘찬미가 제14장’이 아닌 ‘국민가’로 표기되었다. 당시 미주지역 교민단체이며 안창호가 선도하던 ‘국민회’의 단체가로 개명한 듯하다. 안창호이든 신문 편집자이든, 아니면 국민회 간부이든 간에 이 4절 가사를 인식하고 ‘국민회가’(國民會歌)로 개제(改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시기 ‘찬미가’를 텍스트로 했다면 이런 곡명으로의 전환은 가능한 것이다.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2절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기상일세 3절 가을하날 공활한데 구름 업시 높고 말근달은 우리 가삼 일편단심일세 4절 이긔상과 이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우나 즐거오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찬미가’와는 다르게 구(舊)표기법인 ‘아래 아’자를 썼다. 그리고 4절에서 ‘님군을 섬기며’(현 ‘충성을 다하여’)가 ‘민족을 모으고’로 개작되었다. 그러나 4절에서 ‘기상’을 ‘긔상’으로 1908년 ‘찬미가’와 같게 쓰고 있어 근본적으로 ‘찬미가’가 텍스트였음을 추정하게 된다. 이는 ‘찬미가’가 국내외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작사자를 ‘윤티호’로 명기했다.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다. 왜 안창호가 주도하는 ‘국민회가’의 작사자로, 안창호가 모를 리 없는 신한민보가 이 4절 가사를 윤치호라고 했겠는가? 당시 미주지역에서는 안창호의 명성이 윤치호 못지않았다. 이는 윤치호가 명백한, 아니 굳이 이를 따질 필요가 없는 기독교적 애국가의 작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이 노래의 보급을 위해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3.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월간 잡지 ’신한청년‘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발행한 잡지이다. 1919년 11월 27자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1면에 신한청년당에서 월간 잡지 ‘신한청년’ 창간호를 12월 1일 자로 발행한다는 광고를 하기도 했다. 이는 임시정부와 그리고 독립신문과 같은 체제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집필과 편집은 이광수가 맡았다. 발행 주체인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단원들을 주축으로 조직한 한국 독립운동 단체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으로 꼽힌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당원으로는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안창호였으며,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1923년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해체되었다. 바로 이 당에서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제1면에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 4절이 수록되었다.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1.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람 大韓으로 기리 保全하세(후렴) 2. 南山우에 져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氣象일세 3. 가을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업시 밝은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4. 이氣象과 이맘으로 忠誠을 다하야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특징적인 것은 가사에 한자를 썼다는 점이다. 이는 문사인 이광수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부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해를 위한 방식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4절 "님군을섬기며”가 오늘날과 같은 "忠誠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 확인된다. 이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안창호가 개작했다고 하는 부분이라 주목이 된다. 이 부분의 개작은 1919년 12월 이전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광수는 상해에 오기 전 일본 체류 시 조선유학생 총회에서 "새로운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부르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상해에 와서는 3.1 독립운동사 등을 집필하면서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했다면 이 창간호에 "작사자 안창호”라고 표기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이 기록에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보게 된다. 앞서서 살핀 임시의정원 회의 기록이나 김구 제 ‘대한애국가’ 악보에 반영된 입장이 이미 이 시점에 공유된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즉, 작사자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윤치호 작사 사실을 알고 부정적인 의사를 표하는 이들에게는 안창호 작사설을 내비치거나, 또는 아예 무응답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5. 안익태 작곡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2절 가사 세 번째 자료는 1935년 11월 안익태 작곡의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가사이다.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EA KOOK KA) 악보는 국한문과 영문으로 1935년에 발행되었다. 표지 1장과 악보 2장으로 합창 및 피아노 반주부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했다. 신한민보가 주 판매처였다. 가격은 1부당 20센트이다. 1면에는 애국가 1절과 2절이, 2면 악보에는 후렴 가사가 인쇄되어 있다. 이 악보가 1940년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사용 허가를 신청할 때 동봉한 것이기도 하다.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샤 우리 나라만세 2. 남산 위에 뎌 소나무 ㅅ덜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샹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보젼하세(후렴) 이상과 같이 2절 만을 기록하고 있어 가사를 대비하는 자료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다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악보 소재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 가사에는 ‘하샤’, ‘뎌’, ‘ㅅ덜갑’ 같은 구철자를 사용하였다. 이는 앞에서 살핀 ‘국민가’ 보다 늦은 시점임에도 구철자를 썼다는 점에서 ‘찬미가’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구술을 옮긴 것이거나 구철자로 표기한 가사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악보에는 "안익태 작곡, 김준성 목사(John Starr Kim) 영역”이 표기돼 있다. 작사자는 밝히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출판물에 작곡가와 함께 작사자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애국가와 안익태’의 저자 김경래의 기록처럼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황사성 목사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면 악보의 완벽성을 위해서나 가치를 위해서나 이를 표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명색이 태극기와 애국가와 독립선언서로 3.1운동 시위에 참가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한 음악도로서, 더욱이 윤치호로부터 유학비 일부를 도움 받은 자로서 자신이 작곡한 가사의 작사자를 모르고 작곡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안익태는 작사자를 모르지는 않았다고 보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정말 몰랐다면 ‘미상(未詳/Unknown)’이라고 표기하여 악보의 완벽성을 갖췄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악보 발행 후원체인 미주 한인단체와 신한민보 측의 의사를 반영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자라면 이미 작고한 이후임으로 일제의 탄압을 염려한 조치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윤치호라면 임시정부의 입장처럼 밝히지 않는 편이 보급이나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애국가 가사 4절 이 악보는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ANTHEM)’이다. A調 4/4 Andante, 오선보와 숫자보를 병기한 악보는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악보에 부기되었다. 중국 충칭(중경)에서 발행된 김구의 장서인과 친필로 표제를 쓴 표지 왼쪽에 ‘金九 題(김구 제)’와 ‘金九之印(김구지인)’이라는 인장과 김구 친필로 ‘一九四五 十月十八日’(1945년 10월18일)이 쓰여 있다. 뒷면 중앙에는 중사장(中山裝)의 김구 사진이 있고, 사진 아래쪽에서는 ‘한국애국가 고사(故事)’와 작곡자 그리고 번역자(중역/민석린, 영역/정한범)를 소개하였다. 악보집은 충칭의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에서 이사소(李士釗)가 편집, 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역사성과 변천 과정을 담고 있는 ’한국애국가‘에 법적 위상을 부여한 문건이다. 또한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발행한 마지막 출판물이며, 동시에 임시정부 주석 명의로 출판된 첫 공식 악보이다. 김구 제 ‘한국애국가’ 소재 4절 가사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에 저솔나무 철갑을 두른 뜻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정성을다하야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이 애국가는 ①50년 전에 한 ②한국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③일명(佚名)해 버렸다. 처음에 서양 명곡을 채용하여 가사를 메워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 한국의 인사들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전에 ④한국 청년음악가가 새로운 곡조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곧 한국 건국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1945년 50년 전의 상황으로 말했다. 이를 풀이하면 50년 전으로서 ①1895년이다. 이 때 작사된 애국가의 작사자를 1919년 임시정부 수립초기 또는 악보를 발행하는 해방직전인 1945년 시점에서 ‘佚名’했다고 했다. ④작곡 시점을 10년 전이라고 했으니 1935년이 된다. 이 안익태 작곡 시점은 이 시기 우리로서는 알 수 없었던 시점이다.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81년 미주 교민 양주은이 ‘신한민보’ 40년 발행분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②의 "50년 전”이란 표현은 정부와 독립협회의 공동 행사인 1897년 ‘조선개국 기원 505회’ 기념식에서 윤치호가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가를 발표한 시점과 1년 차이이다. 그리고 ‘수기’란 공식 문서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작사’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윤치호가 독립협회 또는 서재필의 요청으로 행사를 위해 준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시기 윤치호는 분명 ‘한 한국애국지사’였음으로 일치하는 표현이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며 외부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발간에 적극 참여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③의 ‘일명’이란 표현은 주의가 요구된다. 윤치호는 1915년 2월 13일 ‘105인 사건’으로 영어(囹圄)의 몸에서 특사로 출감하며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제에의 협조 의사를 내비쳤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을 실망시킨 시점에다 이후 4년 후인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면서 윤치호의 망명(亡命) 내지는 동참(同參)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응하지 않아 크게 원망을 하게 된 시기이다. 정리하면 "김구의 이 기록은 윤치호 작사 동일 후렴 ‘무궁화가’또는 ‘찬미가 제10장’ 작사 사실을 애국가의 시원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여 단지 작사자를 ‘일명’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상에서 190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인쇄 자료에서 곡명, 작사자 표기 여부, 가사의 변이를 살폈다. 그 결과 주목하는 작사자 표기 여부에 대해서는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났음이 확인되었다. 하나는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의 경우 윤치호를 ‘역술자’로, 둘은 1919년 신한민보 ‘국민가’ 기록으로 윤치호 작사로 명확히 밝혔다. 셋은 작사자를 ‘미상’ 등으로도 표기하지 않고 아예 밝히지 않은 경우이다.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와 1935년 안익태 악보의 경우이다. 마지막은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대한국애국가’의 ‘일명(佚名)’ 표기이다. 그런데 ‘찬미가’의 ‘역술자’ 중 ‘술’은 윤치호의 작사를 반영한 것이고, ‘국민가’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표기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적어도 안창호 작사는 아니다”를 명확히 한 것으로,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역설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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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애국가 수록국사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애국가작사자 조사 중인 1955년 7월 30일, 연합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왔다. 윤치호 측의 중요 자료가 위원회에 전해진 결과이다. "윤씨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단정하게 된 물적 증거는 윤치호 친필 애국가 사본(寫本)과 샌프란시스코 거주 양주은(梁柱殷) 씨로부터 보내온 앨범 복사판 및 윤치호 작 찬미가(讚美歌)를 목도(目睹)하였다는 人士들의 중언 등에 의한 것이다.” 세 가지 증거 자료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지난 회에 제기한 윤치호 자필 ‘가사지’이고, 둘은 "샌프란시스코 거주 교포 양주은 씨로부터 보내온 앨범 복사판”, 즉 신한민보 1910년 9월21일자 게재 ‘윤티호’작 애국가 4절(게재 곡명은 ‘국민가’) 자료이다. 마지막은 윤치호 역술(譯述) ‘찬미가’이다. 총 15편의 찬미가를 수록한 가집이다. 이번 회에서는 이 찬미기집을 분석해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임을 재확인하기로 한다. 이 ‘찬미가’의 존재는 현 애국가와 ‘무궁화가’를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명백히 하는 자료이다. 다음의 서양 찬송가 번역 12편과 함께 창작의 애국적 가사 3편이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 KOREA TUNE: AMERICA 664, 646 뎨一 一 우리황상폐하 턴디일월갓치 만수무강 산놉고물고흔 우리대한뎨국 하나님도으사 독립부강 二 길고긴왕업은 룡흥강푸른물 쉬지안틋 금강쳔만봉에 날빗찬란함은 태극긔영광이 빗취난듯 三 비닷갓흔강산 봄꼿가을달도 곱거니와 오곡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셰아락토가 이아닌가 四 이천만동포난 한맘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바리고 충의만압셰워 님군과나라를 보답하셰 ㉡ Patriotic Hymn, TUNE: AULD LANG SIGN, 뎨十 一 승장신손 천만년은 사롱공상 귀천업시 직분만 다하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충군하는 일편단심 북악같이 높고 애국하는 열심의기 동해같이 깊어 三 천만인 오직 한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귀천없이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 Patriotic Hymn, TUNE: AULD LANG SIGN, 뎨 十四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일편단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이상과 같이 창작 찬미가 3편, 이 중 ‘무궁화가’(㉡ Patriotic Hymn)와 현 애국가(㉢ Patriotic Hymn)가 수록되어있다. 이 때문에 이 찬미가집은 중요한 증거자료였다. 그래서 조사 기간인 5월 2일에 "윤치호씨 저 ‘찬미가집’ 가지신 분 알려 주시길 요망”이란 연합신문에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3개월 후에 이를 검토한 결과가 기사로 나온다. 이 자료의 존재는 1970년 7월호 ‘국회도서관보’ 52~53쪽에 사서 윤학구(尹鶴求)가 발표한 ‘解題 讚美歌’가 나와 확인 된다. "尹致昊 著(譯述), 隆熙 二年(1908), 活字本(金屬活字) 一冊, 17.5cm x 12.5cm 18p, 裝幀 赤黃色 表紙 湖附裝” 이 같은 서지사항과 함께 "명치45년(1912) 2월 7일 판매금지도서가 되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이 자료를 증거로 할 때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주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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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제5회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에 대한 脚注"선생이 작사하였지요 라고 물으면 웃고 답하지 않았다.”는 안창호가 자신이 작사라는 사실을 내 세우지 않는 겸손함을 표한 것이다.” 이 ‘겸손’의 표현은 사실일 수 있다! 필자는 4회를 쓰고 나서 많은 시간을 위의 문장을 되뇌었다. 이광수가 한 말이든,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가 가필한 것이든, 이 겸손의 표현이 사실이라면, 나는 30여년을 역사를 배신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안창호설 주장자들을 향해 독설을 내뱉었다. "안창호 선생을 욕되게 하지마라. ‘거짓을 말하지 마라’란 선생의 말씀을 명심하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느냐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거의 3주 정도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5회 분 보내주세요.”라는 편집부의 성화를 들을 때마다 되뇌기를 되풀이 하였다. 모진 말이나 독한 말을 하고는 혼자 전전긍긍하는 내 성정대로 마음을 쓰고 또 썼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의외의 경험을 하고 생각을 되 돌릴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난 해 입었던 옷 주머니에 있던 이쑤시개에 약지 손가락을 찔린 일이었다. 순간,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필자 나름의 이 말의 해석은 이렇다. "주머니 속의 뾰족한 것은 언제든지 뚫고 나 올 수밖에 없다” 작사자가 윤치호든 안창호든 사실이라면, 그 증거는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리고 되돌아가 우연스럽게 또는 지인의 도움으로 받은 자료들은 떠 올려 보았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인사동 고서점에서, 방송 다큐맨터리에서, 해외 싸이트 경매품에서, 그리고 국가상진연구회 회원이 건네 준 자료들에서, 각 설 주장 가문(家門)에서 공개한 자료들을 속에서 드러낸 것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들은 말 그대로 스스로 존재를 드러낸 것들이다. 예컨대 애국가 역사에서 문제적 시기로 볼 수 있는 1907년을 전후하여 생산된 자료들이 그것들이다. 다음의 네 가지를 대표적인 자료로 꼽을 수 있다. 하나는 ‘1907년 作’으로 표기된 ‘윤치호 자필 가사지’의 존재이다. 둘은 1908년 태극학보 2월호 애국생(愛國生/안창호) 명의 ‘贊愛國歌’의 존재 확인이다. 셋은 1908년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의 존재다. 넷은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 게재 <국민가> ‘윤티호’ 표기 자료이다. 이상의 네 가지는 직접적으로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라고 가리키는 자료이다. 특히 두 번째 자료는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의 존재가 확인 된 것이니, 이와는 가사가 다른, 즉 현 애국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를 예찬(禮讚)한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1907년 작사한 윤치호 작사를 인정한 것이 되는 자료이다. 네 번째 자료는 매우 의미심장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 번 회의 주제인 ‘안창호의 겸손(謙遜)’ 주장을 상쇄(相殺)시키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실질적인 안창호 주재의 신한민보가 애국가와 가사가 같은 4절을 <국민가> 곡명을 바꿔 윤치호 작사로 발표한 것은 앞의 ‘겸손’ 주장과는 상치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이에서 확산된 단순 기록을 제외한 모든 자료는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향한다는 점에서 안창호설은 페기 되어야 하는, 풍화(風化)를 겪는 낭설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로서 제5호로 제시한 ‘안창호의 윤치호에 대한 배려’에 대한 脚注를 뒤늦게 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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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해판 독립신문 유일본 최초 공개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삼일절 103주년을 맞아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29일까지 1층 로비에서 '독립신문' 5개호 원본을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를 개최한다. 독립신문은 1919년 8월21일 창간된 상하이 임시정부 기관지로, 임시정부 활동상과 독립운동 동향 등을 다뤘다. 24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이번에 공개되는 독립신문은 1924년 10월4일에 나온 177호를 비롯해 그해 11월29일과 12월13일에 간행된 178호와 179호, 1925년 1월1일 신문인 180호, 1926년 10월23일 발행된 195호다. 177∼180호는 4면이고, 195호만 8면이다. 177호에는 의병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40여세임에도 불구하고 조국이 독립될 때까지 결혼도 미루고 무장투쟁에만 전념한 잊혀진 항일영웅 채찬(백광운) 장군의 사진과 약력, 선언서, 추도문 등이 수록됐다. 1면에 남만참변과 채찬에 관한 내용이 크게 담겼다”고 설명했다. 독립신문은 채찬에 대해 "평생에 한 사업은 국토 광복”이라며 "공적으로 말해도우리 독립당에 수령이 될 만한 이”라고 평가했다.178호에는 대표적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당시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인으로 강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애타게 호소한 백암 박은식의 논설이 게재됐다. '우리는 믿을 것이 있어야 하겠소’라는 글이 실렸다. 박은식은 "무릇 인류의 사업은 믿는 생각으로써 원인이 되고 믿는 힘으로써 결과를 얻는 것이라”며 "믿는 생각과 믿는 힘이 박약하게 되면 용두사미가 된다”고 주장했다. 180호에는 '동아일보', '신한민보'에 정의부 결성 사실만 단신으로 실렸으며, 일본정보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만주지역 대표적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의 선언서와 선서문 원문이 수록됐다.195호에는 법조인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해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민족통합' 필요성을 애끓는 심정으로 호소한 홍진의 서한 등이 게재돼 있다. 이밖에 178호에는 독립운동가 김형모의 사진이 수록돼 있다.한편 박물관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개막 당일인 28일 오전 10시 관람객을 위한 전문가 강연회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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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유산, 보물과 등록문화재 된다문화재청은 광복절을 앞두고 태극기와 광복군 유물 등 항일독립유산들을 대거 보물과 문화재로 지정·등록 예고했다.12일에 열린 제4차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의 심의에 따라 ‘데니 태극기’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 ‘서울 진관사 태극기’ 등 태극기 유물 3건은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와 별도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 4건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독립운동사료를 포함한 근현대문화유산에 대한 적극적인 역사·학술 가치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요구에 따라 2019년부터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들에 대한 검토를 시작해 작년에 「말모이 원고」 등 한글 관련 문화재 2건을 보물로 지정했으며, 이후 두 번째로 태극기 3건을 이번에 보물로 추가 지정 예고하는 결실을 맺었다. * 조사대상 선정 국가등록문화재: ①데니 태극기(국가등록문화재 제382호), ②김구 서명문 태극기(제388호), ③불원복(不遠復) 태극기(제394호), ④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제458호), ⑤말모이 원고(2020년 보물 지정), ⑥조선말 큰사전 원고(2020년 보물 지정), ⑦윤동주 친필 원고(제712호), ⑧이봉창 의사 선서문(제745-1호) 이번에 지정 예고한 태극기 3건은 19세기~20세기 초 제작된 것들로, 일제강점기 혹독한 시련 속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문화재이다. 우리 역사 최초로 국기(國旗) 제작이 시도되고 변천되는 과정과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대한민국 역사의 대표이자 우리 민족의 상징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데니 태극기(데니 太極旗)」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가 소장했던 것으로, 1891년 1월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가지고 간 것을 1981년 그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기증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이 태극기가 데니의 유품 중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가 조선에 마지막으로 머문 해인 1890년을 제작의 하한연대로 보고 있다. *O.N.데니: 1877년 중국 천진(天津) 주재 미국영사를 시작으로 1880년 중국 상해(上海) 주재 미국영사로 재직 중, 1886년 이훙장(李鴻章)의 추천을 받아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및 내무 담당 고문으로 부임. 이후 4년 동안 외교·법률·경제 분야의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실무를 담당. 1886년 6월 조선과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 시 국제관례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이 불리한 통상 조약을 맺지 않도록 조선을 보호하고자 했고, 조선이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서 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조력함. 1888년 3월 『China and Corea』를 발표해 서구의 국제법적 이론을 토대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히고 청의 내정간섭을 부정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인해 중국의 미움을 사 결국 1891년 1월 조선을 떠나게 되었음. 1977년 로버트 R. 스워타우트(Robert R. Swartout) 교수에 의해 ‘데니문서’가 발견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본격화되었음. ‘데니 태극기’는 세로 182.5cm, 가로 262㎝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우리나라 국기 제정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는 점에서 뜻깊은 사료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시기는 1882년 9월이었고 1883년 3월 6일 고종은 전국에 사용토록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19세기 말 한국의 국기가 반포된 이래 그 모습을 그리거나 기록한 자료들은 일부 남아 있지만 실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데니 태극기’는 우리나라 국기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태극기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설: ①태극기 제정은 1882년 5월 미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논의되었음.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의 회고에 따르면 5월 22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서로 국기를 교환했다고 함. 이를 방증하는 자료가 미국 국회도서관 슈펠트 문서철에 보관되어 있으며, 1882년 7월 19일에 미국하원이 태극기 도식(圖式)을 승인한 자료인『Flags of Maritime Nations』에도 실려 있음 ②1882년 9월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영국공사 애스턴, 선장 제임스와 논의하여 제작하였고, 일본에 도착해 숙소에 건 것이 최초의 태극기라고 알려져 있음. 박영효의『사화기략(使和記略)』문건 안에도 이미 4괘와 8괘가 그려진 기(旗)가 준비되어 있었고 "상[고종]에게 명(命) 받은 바 있다”는 언급으로 보아 박영효가 개인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닌 조정에서 논의된 것을 일본으로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보여준 것으로 판단됨 1883년 태극기 사용이 전국에 선포되었지만 규격 등이 정해지지 않아 1949년 국기 제작법이 제정될 때까지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제작되었다. ‘데니 태극기’는 제작기법 측면에서도 근대문물이 밀려오던 19세기 말 정세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당시 서양 국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참조한 것으로, ▲ 전통적인 손바느질이 아닌 상하 90cm 정도 크기의 넓은 폭의 면직물을 바탕재료로 하여 재봉틀을 사용해 박음질했다는 점, ▲ 청색·홍색 태극과 청색의 4괘(四卦)를 부착하는 데 있어 바탕천을 오려내고 두 줄로 박음질해 멀리서도 문양이 또렷하게 보이도록 시각적 효과를 꾀한 점 등 초창기 국기 제작법을 적용해 매우 정교하고 정성껏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깃대 속에 머리카락 또는 동물의 털 뭉치를 채워 넣은 사실이 과학조사 결과 밝혀졌는데, 이는 심을 튼튼하게 만들어 관공서 등에서 게양했을 때 세로로 단단히 버틸 수 있도록 착안한 방식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데니 태극기’는 ▲ 국기를 제정해 독립국임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대한제국 외교적 노력을 증명하는 유물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한 열망의 상징이 된 태극기의 기원을 보여준다는 점, ▲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한 미국인 외교관 가문이 90여년 넘게 간직해 오다 우리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진정한 호혜(互惠, 서로 동등하게 혜택을 누림)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 ▲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큰 태극기라는 점 등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할 사유가 충분하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金九 署名文 太極旗)」는 1941년 3월 16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김구(金九, 1876~1949)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를 적어 친분이 있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梅雨絲, 본명 샤를 메우스 Charles Meeus)에게 준 것이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 신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했고,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안창호 유품’ 중 하나로 1985년 3월 11일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1941년 경 매우사 신부는 선교사로서 중국 충칭(中慶)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가기 전 김구 선생이 태극기에 글을 써서 주며 미국에 가서 우리 동포를 만나면 이 글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함. ‘김구 서명문 태극기’의 전래에 얽힌 일화는 미주 한인들이 발간한 신문인『신한민보』1942년 3월 19일자(3면)에 자세히 보도됨. 세로 44.3cm, 가로 62cm 크기의 비단 천에 청색과 홍색의 천으로 태극을 만들어 붙이고, 흑색 천으로 4괘를 덧대어 제작한 소형 태극기이다. 깃대는 오른쪽에 천을 덧대어 만들었으며, 괘는 가로 상단에 건괘(乾卦)와 감괘(坎卦), 하단에 이괘(離卦)와 곤괘(坤卦)가 배치되어 있다. 깃대와 괘의 사이에는 김구 선생의 친필로 묵서 4줄 143자가 쓰여 있고 마지막에 ‘김구(金九)’라고 새겨진 작고 네모난 인장이 찍혀 있다. 이 태극기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김구와 안창호로 대표되는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한국인들의 광복에 대한 염원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서명문에서 김구는 망국의 설움을 면하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광복군을 도와줄 것을 강하게 호소하였다. "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 당신은 우리의 강복 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의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의구(義句, 올바른 글)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지국(止國,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게 바쳐 강노말세(强弩末勢, 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김구 서명문 태극기’는 ▲ 지금까지 알려진 19세기~20세기 초 제작 태극기 중 정확한 제작시기가 알려진 유일한 자료라는 점, ▲ 대한민국의 독립을 열망한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한 신념이 대표적으로 담겨 있다는 점, ▲ 매우사 신부로부터 안창호 선생이 태극기를 전달받기까지 상황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어 전래 경위가 분명하다는 점, ▲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태극기의 제작규정을 통일하기 직전에 제작되어 태극기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서울 진관사 태극기(서울 津寬寺 太極旗)」는 2009년 5월 26일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의 부속건물인 칠성각(七星閣)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단(佛壇) 안쪽 벽체에서 발견된 것으로, 태극기에 보자기처럼 싸인 독립신문류 19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신문류는 「경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自由晨鐘報)?·?신대한(新大韓)?·?독립신문? 등 5종으로,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발행된 사실로 미루어 진관사 소장 태극기 역시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태극기를 숨긴 인물로 진관사 승려였던 백초월(白初月) 혹은 그와 밀접한 연관이 있던 승려라고 추정하고 있음. 백초월은 3.1만세운동 직후 비밀 지하신문인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불교계의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만주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제공하는 등 국내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인물임. 또한 태극기가 싸고 있던 자료들이 1919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되어 국내에 밀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를 감추기 위해 태극기에 싸서 칠성각에 숨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진관사 태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항일(抗日) 의지를 극대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쪽 윗부분 끝자락이 불에 타 손상되었고 여러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있어 만세운동 당시 혹은 그 이후 현장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현재 1919년에 제작된 태극기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태극기는 1919년에 제작된 실물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 진관사 태극기와 발견된 독립신문류 현황 자료명 발행일 수량 비고 신대한신문 제1호 1919년 10월 28일 화요일 제2호 1919년 11월 3일 월요일 제3호 1919년 11월 12일 수요일 3점 단재 신채호가 발간한 신문으로 국내에 새롭게 알려짐 독립신문 제30호 1919년 11월 27일(2점) 제32호 대한민국 원년 12월 25일(2점) 4점 특히, 제30호에는 ‘태극기’라는 제목의 시(詩)가 수록되었음 조선독립신문 <호외> 제32호 1919년 6월 6일 제40호 1919년 8월 12일 제41호 1919년 8월 제42호 1919년 8월 20일 5점 자유신종보 제4호 미확인 제7호 대한민국 원년 9월 19일 제12호 대한민국 원년 10월 6일(4점) 6점 중국 상해에서 발간된 독립운동계 신문으로, 최초 공개된 자료 경고문 1919년 6월 1일 1점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고한경고문으로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간행된 것으로 추정 아울러 진관사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에도 태극기와 태극문양 및 태극기 관련 기사가 실려 있어 더욱 의의가 있다. 특히, 태극과 4괘가 우주 만물의 기본 요소나 만물의 생성·변화·발전하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기존의 견해와 달리, ‘힘과 사랑’을 토대로 ‘자유와 평등’을 온 세상에 실현해나가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당시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함께 살펴볼 수 있어 ‘진관사 태극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준다. ‘진관사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형태상으로도 일장기 위에 태극의 청색부분과 4괘를 검정색 먹물로 덧칠해 항일 독립의지와 애국심을 강렬하게 표현했으며,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사례라는 점에서 항일 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이처럼 ‘진관사 태극기’는 ▲ 불교계 등 다양한 계층에서 주도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 ▲ 항일 정신을 형태상으로 강력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점, ▲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를 통해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해 문화재에 담긴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 ‘데니 태극기’ 등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서명문 및 축하문」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임시정부 주석이자 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인 김구의 주관 아래 거행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관련 유물이다. 서명문은 전례식에 참석한 중국 측 인사와 서방 외교사절, 신문사 대표들이 서명한 유일의 원본 방명록으로, 충칭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외교 활동, 언론 창구를 확인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축하문은 전례식을 축하하는 의미로 중국 인사들이 보낸 것으로, 사진으로만 전해오던 당일 전례식 단상에 실제로 걸려 있었던 실물자료로 역사적 가치도 높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선전하여 항일 독립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1941년부터 1942년까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기관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독립운동 취지와 활동 상황을 군사, 외교, 국제정치, 경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기관지 제목인 ‘光復(광복)’의 글씨를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또는 지청천)의 필체로 활용한 점도 역사적 의미를 더하는 자료다. 「한국광복군 훈련교재 정훈대강」은 1945년 5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에서 발행한 소책자 형태의 훈련교재로, 조국 광복의 최선봉을 담당할 한국광복군의 ‘강철 같은 정신 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내용 구성은 일반강령, 기본정책, 본군의 정훈계획(학과훈련, 선전대강) 등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발한 독립운동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교재는 한국광복군이 이전까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있다가 중국과 끊임없는 교섭을 거쳐 마침내 1945년 5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속으로 변경되어 그 통할을 받음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어 역사·사료적 가치가 높다. 「김좌진 장군 사회장 약력서」는 1930년 1월 만주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金佐鎭, 1889.11.24.-1930.1.24.)의 사회장(1930년 3월)에서 낭독된 약력서다. 김좌진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한국독립운동사의 무장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본 약력서는 그의 출생과 성장, 사망, 주요 활동과 사상, 가족관계 등을 연도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김좌진 장군의 전 생애를 순차적으로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등록 예고되는 4건에 대해서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이번 태극기 보물 지정 예고를 계기로, 역사·학술적 중요성이 널리 인정된 국가등록문화재 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여 이를 국보·보물 지정 대상에 포함시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제도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계획이다. 또한, 항일독립유산 등 다양한 근현대문화유산을 꾸준히 발굴하여 지정·등록하도록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으로 임하여 우리 문화재의 숨겨진 가치를 재조명하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다. 한편, 지난 6월에 등록 예고된 바 있는「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과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문화재로 등록했다. 「서윤복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메달」은 1947년 4월 서윤복 선수가 광복 이후 우리나라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KOREA'(코리아)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달고 국제대회인 '제51회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우승하면서 받은 배지 형태의 메달이다. 서윤복 선수의 우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 군정 시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KOREA'(코리아)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세계에 알렸던 사건으로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는 6・25 전쟁 중 첫 출격(1952.12.14.)을 앞둔 환송행사(장행회(壯行會), 1952.12.5.)에서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천영성)에게 제2기 후배들이 응원과 성명(서명문)을 담아 전달한 태극기다. 응원의 내용은 '臨戰無退(임전무퇴)', '信念(신념)', '祖國統一(조국통일)', '快男兒(쾌남아)', '祝初出擊 先輩 千永星 中尉(축초출격 선배 천영성 중위)' 등으로, 출격에 임하는 조종사에 대한 격려와 전쟁 승리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아울러, 6·25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정규과정을 통해 조종사를 배출하려는 공군의 의지와 노고가 상징적으로 집약된 첫 출격의 기록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 천영성(1929~2019년/6·25 전쟁 중 62회 출격):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전투 항공지원작전(52.10.25 ~53.7.27)’ 에 F-51D 전투기 편대로 투입되어 적 벙커·동굴을 파괴하는 등 38선 북쪽의 설악산·속초지역 및 거진-간성지역을 확보하는데 기여(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 역임) 문화재청은 이번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이들 2건도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력하여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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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단상. 애국가, 그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3년 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남북이 함께 기념한다며 소란을 떨던 것을 생각하면 금년은 거의 적막한 기념식 분위기이다. 현실 정치 상황과 코로나19에 지배당한 결과인 듯하여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번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그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정중히 기념식을 가져야 한다. 1919년 3월 1일, 종로2가 탑골공원 팔각정에서는 오후 2시를 넘기면서 청년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한 시간 뒤인 3시쯤에는 인사동 태화관에서는 한용운 등 29인이 모여 선언서를 낭독함으로서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한일병합조약 무효와 한국 독립을 만천하에 선언한 것이다. 이로서 대한제국의 백성이긴 하지만 일제의 황국신민이 아닌 자유·평등·주권·평화를 위해 행동하는 세계시민이 되었음은 물론,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여 제국에서 민국으로,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드디어는 전통에서 현대로 대 전환을 맞이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4월 초순까지 70여일 동안 전국과 해외 동포사회에서 1450여회에 106만여명이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연히 진압 과정에서 일경에 의해 600여명이 사망하고, 1만 4천여명이 체포, 구금되었다. 그럼에도 만세운동은 거세게 전국 곳곳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때의 시위 형태는 대체로 다음의 순으로 진행되었다고 파악된다. ‘학교나 교회 앞마당, 마을 입구 공터 등의 ‘최초 집결→ 주동자의 독립선언서 낭독→ 지역 유지들의 연설→ 만세 3창→ 노래 제창→ 조선독립만세 등의 구호 제창→ 시장통 등을 향한 행진→면사무소 등의 재집결’ 시위의 결집력을 높이고 대오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노래가 필요했다. 그래서 ‘노래 제창’에는 학교에서는 애국가와 교가와 독립운동가가 불렸고, 교회 집회에서는 찬송가와 애국가류가 불렸다. 또한 시장통아나 면사무소 앞에서의 대규모 재집결시에는 애국가와 독립운동가는 당연하고 미리 전단으로 배포한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목포 정명여학교 시위에서는 "터젔고나 터졌고나 조선독립성~”으로 시작되는 ‘독립가’가 불렸다. 대개 교사나 선교사 같은 지도자가 있는 시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전북 고창군 고창면 시장통 3월 19일 시위에서 독립선언서와 독립가가 배포된 예가 있는데, 계획한 지도자가 있었던 상황이다. 그동안 발굴된 관련 기록을 통해 볼 때 구체적으로 가사와 곡조가 밝혀진 것은 학교 교가류, 애국가류, 찬송가류, 독립운동가류를 포함하여 10여종에 이른다. 이 중에 전국적이고도 보편적으로 불린 노래는 애국가이다. 1897년 7월 서대문 독립관(獨立館)에서 개최된 제505회 조선 개국기념 경절회(慶節會)에서 불린 윤치호(尹致昊) 작사 ‘무궁화가’(Song National Flower)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후렴과 곡조를 계승한 것, 바로 오늘의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4절 노래이다. 이는 1907년을 전후하여 유포된 윤치호 역술(譯述) 「찬미가」 소재 ‘Patriotic Hymn 14’(제14장 애국 찬미가)로 개성의 한영서원과 호수돈 여학교를 비롯한 주요 지역 미션스쿨에서 불리기 시작한 노래다. 감리교 신자인 윤치호의 애국적 찬송가의 한 편으로 작사한 것이 1910년대에 이르러 국내는 물론 중국 간도 명동학교에서도 불리게 되었다. 후렴과 제1절 가사의 애국적 내용이 응집력을 발휘하여 전국적 전파 현상을 갖게 되면서, 이런 전파 상황에서 3.1운동 기간의 시위 현장에서 민중들은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현장에서 이 애국가가 불렸음은 당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선교사의 자료나 일제의 재판 기록, 또는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애국가가 불린 기록을 선교사 켄달(Carlton W. Kendall)의 보고서 「한국독립운동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에서 확인 된다. 3월 20일경의 서대문 인근 시위 기록이다. "군중들은 무장하지 않았다. 행렬은 젊은이와 학생 그리고 노인과 부녀자들로 구성되었다. 군중들은 10년간 부르지 못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에 맞춘 한국의 국가(National Anthem)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며 함성을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또 하나의 자료는 1923년 서재필 박사의 자전적 저술 「한수의 여정」(Hansu’s Journey)에 주인공 한수(HANSU)의 눈에 비친 3.1운동시위 현장 기술 대목이다. "군중들은 공원 밖으로 행진해 나가기 시작했고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근 10년이나 부르지 못했던 국가(National Anthem)를 힘차게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국가를 위한 환호 소리를 연거푸 소리 질렀다. 군중 전체가 마치 자기들이 새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기뻐 날뛰었다. 그들은 말도 없고 고개들을 숙이고 망설이는 걸음 거리에 슬금슬금 남의 눈치만 보던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웃을 대로 웃었고 하고 싶은 말을 다했고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어 댔다.” 두 기록 모두 애국가가 아닌 국가를 뜻하는 ‘National Anthem’으로 표기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다. 이 시기 앞에서 살핀 동일한 곡조, 동일한 후렴의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는 ‘무궁화가’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는 문헌상의 존재이고 실제 확인 되지는 않는다. 1907년을 전후 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로 대체된 결과이다. 다음은 애국가의 의역인 ‘there national cry’로 표현된 자료이다. 당시 세브란스의전 소속 ‘브리스 자작 조사위원회’(Bryce Viscoint Investing Commission)소속 오웬스(한국명 오은수) 5월 24일 보고서 일부이다. 실제 내용은 3월 5일 오전 9시경의 남대문 일대 시위 상황이다. "3월 5일 오전 9시를 기해 큰 소요가 있었다. 철도역 대로에서 일어났는데 상점 골목에서 뛰어나온 젊은이들이 애국가를 부르며(calling out there national cry) 기차역으로 향하였다. 순간 인력거에 있던 한 남자가 군중들에 에워 쌓여 남대문으로 향하였다. 높이든 양 손에는 빨간 끈이 있었고 남대문을 지나 시가지로 들어갔다. 이 행렬을 대부분 학생들로 이루어졌고 여고생들도 참가했다. 경찰과 대치하는 행렬을 반마일이나 되었다.” 일반적인 "sang a song’으로 표기하지 않고 ‘national cry’라고 표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 인식으로 단순한 노래가 아니고 ‘국가적인 노래’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미 민중들의 정서적 공인을 받고 불리는 공공의 노래임을 인식을 한 결과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기록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음은 중국 동포사회 3.1운동 시위에서도 애국가가 불렸음을 알게 하는 기록을 본다. 3월 31일 봉천성 집안현 납석차 교회당에서 약 600명이 만세 시위상황 기록을 본다. "3월 31일 오전 10시경에는 약 600명이 모였고, 그 중에는 100여 명의 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오에 납석차의 기독교 지도자인 고종호(高鐘鎬)가 독립선언에 대해 연설하였다. 이어 애국가를 합창한 후 시위대는 태극기를 들고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부근을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집안현 치화보 사구령 보갑국(保甲局) 및 유수림자 순경국(巡警局)과 보갑국원들이 출동하여 제지함에 따라 오후 5시에 해산하였다.” 이렇게 3.1운동은 조선독립만세와 태극기와 애국가로 진행되었다. 국가상징 국호 조선, 국기 태극기, 국가 애국가가 자연스럽게 민중들에게 인식되었다. 이중에 국호와 국기는 대한제국기 직간접적인 제도의 공인을 받아 활용되어 왔으나 애국가는 1907년을 전후하여 기독교계 학교로부터 확산되어 비로소 3.1운동 기간에 전국적으로 불림으로서 ‘유일한 애국가’로 공인된 것이다. 이 결과로 애국가는 두 가지의 분명한 현상을 얻게 되었다. 하나는 임시정부가 국기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를 국가상징으로 채택하였다는 사실이다. 임시정부는 국호 ‘대한민국’에 대하여는 논의를 하였다. 그러나 국기와 국가에 대해서는 논의 없이 채택하였다. 「임시의정원회의록」에도 관련 논의 사실이 없고, 곧바로 의전에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시정부의 의정원 개원식 기록이다. "총의장의 사회로 개식을 선언하고 일동이 기립하야 애국가를 창한 후 국기를 향하야 최경례를 행하였다.” 이런 결과와 함께 두 번째 현상은 애국가가 일제의 탄압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애국가를 부르거나 기록하는 것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보아 탄압을 한 것이다. 이런 탄압상은 2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1923년 4월에 국내에 잠입했다 체포된 임시정부 연락원들이 형무소 내에서 4월 10일의 임시정부 창립일 ‘애국가’를 불러 크게 제제를 당했다. 또한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휴대한 학생이 구인되어 엄중한 취조를 받기도 했다. 이 중 1924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는 ‘愛國歌 사건’이란 보도에서 그 탄압상을 짐작하게 한다. "愛國歌사건으로 잡힌 로희성(盧熙星. 30), 시내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근일에 시내 종로 3정목 93번지 사는 로희성을 체포하야 비밀리에 취조 중이라 하며 시내 청진동 청진여관에서도 한명을 인치하야 취조한다는 데 들은 바에 의하면 모다 지난번 애국가사건에 관련된 것인 듯하다더라.” 기사 제목이 ‘애국가사건’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이런 사건이 매우 많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런 애국가 탄압은 일제가 3.1운동 시위 현장의 노래라는 인식에서 강력하게 통제했던 것으로, 강점기 내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편 1940년 애국가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 있게 되었다. 바로 중경 임시정부에서 안익태 작곡 새 곡조로 애국가를 부르게 된 사실이다. 이는 오랜 세월 외국 곡조 ‘올드 랭 사인’에서 온전한 우리 손에 의한 곡조의 애국가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안익태가 1930년 10월 초순 미국 유학길 첫 예배에서 갖게 된 감동과 비감의 애국가 연주로부터 작곡 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에서 자신의 장학기금 마련을 위한 예배가 있었다. 그 마지막 순서에서 첼로로 애국가를 연주하게 되었다. 당연히 슬픈 선율의 외국의 ‘올드 랭 사인’ 곡조였다. 기미가요(君が代)’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조국을 떠나 큰 음악가의 꿈을 품고 유학 온 청년 안익태는 이 애국가 연주에서 굳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남의 나라 곡조라니. 내가 애국가를 우리 가락으로 지어내야겠다.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사에 생명이 있다. 희망이 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나의 조국이다.” 1934년 9월, 후렴 부분을 남긴 1차 작곡을 끝냈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드디어 작곡을 완성했다. 미주교민 신문 신한민보에 그 감동을 담았다. "아시아 동반도의 도덕적인 대한국 애국가인 만큼 경솔히 작곡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과거 5년간 구심 근작 하여 약 2년 전에 처음 절은 필하였습니다만 후렴을 필하지 못하고 지나는 도중 지난 11월 사흘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로 하느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근작하였습니다.” 5년 전에 결심한 ‘우리 가락’으로 애국가 작곡을 완성했음을 ‘하느님의 암시’로 돌렸다. 스스로를 격상시킨 것이기도 하지만, 암울한 현실에 민족혼을 담은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안익태의 이 같은 감격은 개인만의 것은 아니었다. 미주지역 교민사회, 특히 한인 교회에서 환영하여 불렀다. 신한민보도 기사를 통해 보급운동을 벌였음은 물론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EA KOOK KA)란 표제의 악보를 발행하고, ‘신애국가’ 음반을 제작하여 해외동포와 흥사단 같은 독립운동 전선에 보급을 하였다. 이런 미주지역의 반응은 교민단체 중 그 규모와 권위가 가장 큰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임시정부에 공식적인 사용 허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愛國歌 新曲譜 許可.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安益泰가 作曲한 愛國歌 新曲譜의 使用 許可를 要求하였음으로 大韓民國 22년 12월 20일 國務會議 內務部로서 그 使用을 許可하기로 議決하다.” 이 같은 사용 허가 요청은 임시정부의 위상뿐만 아니라 애국가에 대한 위상도 확인시켜 준다. 동시에 허가권자인 임시정부도 당연히 이를 사용하게 되었음을 알게 한 것이다. 이 변화는 이듬해인 1941년 중경 임시정부 국군 광복군의 성립식에서 안익태 곡조의 애국가를 공식적으로 연주하게 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임시정부에서의 안익태 신곡보 채택은 작곡가 안익태가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사용 요청을 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임시정부가 작곡료를 주고 위촉하여 그 결과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청년 음악가 안익태의 순전한 애국심에 의한 작곡이고, 이의 진정성을 교민단체가 임시정부에 전해 채택되기에 이른 것이란 점이다. 이는 1906년 교육용의 ‘애국적 찬송가’의 하나로 작사한 윤치호의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작사인지도 모르게 학생들과 대중에게 전파된 사정이 그렇다는 것이다. 드디어 1945년 8월 해방을 맞았다. 마음 놓고 애국가를 소리내어 부를 수 있게 되었다. 11월 21자 ‘예술통신’은 미국에서 귀국한 김호(金乎)씨 제공의 ‘창의적이고 아름답고 웅대한 악보’를 게재하며 "미국서는 모든 국가 의식에 조선을 대표하는 때는 벌써 이 곡을 쓰고 있고 특히 조선어 방송 시간에도 쓰고 있다"는 정황 까지 전했다. 또한 10월 18일에는 김구선생이 제자(題字)를 쓴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한국애국가(韓國愛國歌)’란 악보집을 발간했다.11월 23일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 비행기에서 한반도가 보이자 "누구의 지휘도 없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가 엄숙하게 흘러나왔다. 비행기 속 공기를 흔드는 노래 소리는 어느덧 울음 섞인 노래”로 불렸다. 그리고 12월 16일, 드디어 이뤄진 명치좌(明治座)에서의 ‘해방기념음악회’에서 이화여고생들의 합창으로 국내 초연이 이뤄졌다. 북한도 1948년 7월 8일 ‘북조선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태극기와 애국가 사용 페지 결정 전까지 애국가를 불렀다. 다만 곡조는 안익태 곡이 아닌 기존의 ‘올 드랭 사인’곡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이 개최되었다. 의전 순서에 따라 경찰취주악대 반주와 연합합창단과 국민의 합창으로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드디어 국가 애국가는 그 역사성과 정통성을 공인 받았다. 이로서 애국가는 적어도 대한민국 국가의 위상을 부여받은 것이다. 세계 국가사에서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온 노래가 드디어 국가로 승격되는 계기는 국가적 행사에 공식적인 의전 순서에서 연주된 것이라는 사실을 견준다면 이 경우는 이의가 없는 것이다. 3.1운동 시위현장,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 중경 임시정부 국군 광복군 성립식,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식에서의 공식 연주, 정통성을 공인 받은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애국가의 긴 여정을 통해 오늘의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애국가는 나라사랑을 표현한 노래를 말 하는 보통명사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의 명칭이란 고유명사다. 이 동시성에는 두 가지을 함의 한다. 하나는 식민지와 임시정부와 미군정기를 가졌던 특수성에서 ‘애국가’와 ‘국가’의 의미를 함께 담은 것이란 점이다. 이는 우리민의 특수한 현상이다. 또 하나는 나라를 상징하는 국가 상징물로서의 국가이기보다는 나라사랑을 촉구하는 애국적인 노래로서의 기능성을 우선한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작사자 윤치호나 작곡가 인익태 모두 개인적인 애국심에서 작사하고 작곡한 것이지, 공적 기구의 의뢰나 작품료를 받고 위촉 받아 완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애국심의 발로라는 진정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오늘의 국가상징물이 되기까지는 작사자나 작곡가와 무관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애국가가 지닌 최고의 가치이며 다른 나라와 변별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그 위상과 가치를 변경하거나 재설정을 필요할 때는 이를 선택한 역사 공동체 시기 민중을 존중하여 신중해야 한다. 즉, 이를 상회할만한 새롭고 유의미한 대체 명분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그 명분은 분명하다. 곧 통일에 의한 남북민의 자유로운 선택, 그 명예롭고, 위대하고, 역사적인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3·1운동 102년을 맞는 우리의 핵심 화두는 서두에서 제시한 3.1혁명 정신 자유·평등·주권·평화여야 한다. 아직도 일제 잔재 청산 단죄와 분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하다면 작사 작곡자의 친일문제는 국가 애국가의 역사성과 정통성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친일 사실을 문제가 없다거나 문제를 삼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국가상징물은 이를 규정한 공적 의미에 한정된다는 편협한 해석의 문제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애국가의 오늘은 역사의 고비마다 민중에 의해 자연스럽게 선택된 결과라는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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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의 독립운동가, 강혜원 선생 선정‘20년 7월의 독립운동가, 강혜원 선생 선정 ‣ 강혜원 선생은 미주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등에 군자금 지원 및 동포에게 민족교육운동 등을 실시함 ‣ 어머니 황마리아, 남편 김성권, 동생 강영승 등 가족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함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강혜원(1885.11.21.~1982.5.31.) 선생을 ’2020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선생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황마리아를 따라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 그곳에서 삯바느질을 하여 학비를 벌었으며 1913년 4월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부인운동을 시작했다. ○ 1919년 3월 올케 강원신을 비롯하여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신한부인회는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는 한인여성단체였다. ○ 그리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인회를 통합하여 1919년 8월에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하고 선생은 총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 1921년 4월 28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들과 함께 「여자애국단 경고서」를 발표하고 단비(團費) 수납을 촉구했다. 선생은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냈으며, 이렇게 어렵게 모은 돈을 선생을 비롯한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했다. ○ 이후에도 부인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며 1940년 1월, 1941년 2월, 1941년 12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단장으로 3번이나 선임되어 3년간 활동했다. ○ 이처럼 선생은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지원했고,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 해방 이후에도 재미한인전후구제회(在美韓人戰後救濟會)와 함께 본국에 구제품을 보내기도 했으며, 1982년 5월 31일 별세하여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Rosedale) 공동묘지에 계시다가 2016년도에 남편과 함께 유해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선생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 어머니 황마리아(1865~1937)는 하와이 한인사회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2017년 애족장에, 남편 김성권(1875~1960)은 하와이 한인 한인단체인 한인합성협회, 흥사단 등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2002년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며, ○ 동생 강영승(1888~1987)은 미주한인사회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을 취득한 인물로 대한인국민회, 신한민보 등에서 민족운동에 헌신 2016년 애국장에, 올케 강원신(1887~1977)은 선생과 함께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95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자료제공 :(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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